영혼의 양식
실존의 세계에 관하여
인간은 누구나 생각들을 하며 살아간다 느껴지는 세계를 표현하거나 음미하는데 그러한 방법론들이 철학이거나 예술이거나 문학일 수도 있다.
과학이란 학문이 실용성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생각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수학이란 생각의 세계를 숫자로 표현하는 분야인 것이고 문학이란 글로써 음악이란 음표로서 미술이란 그림으로 표현하는 실존세계다.
그것이 가상으로 다가올 수도 실체보다 더한 실존으로 다가올수도 있으니 이를 인식하고 대하는 법에 따라서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성경엔 생명나무의 길을 화염검을 두어서 하나님께서 엄히 지키게 하셨으나 실상 20세기 산업화를 들어서면서 부터 인류의 정신문명은 유래없이 심각한 오염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한 부분들이다.
21세기를 앞두고 수많은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그리고 철학사조에 이르기까지 실존이란 화두가 팽배했으니 목숨을 걸만큼 몰두하고 집중했었지만 인류는 얻은것이 없었다.
혼이란 혼적세계란 꿈과 같은 것일까?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은 이를 두고서 하나의 암시적 존재세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골짜기를 들어섰다는 것은 프로이드 또한 실존의 세계에 깊숙히 발을 내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20세기 수많은 철인들과 예술인 문필가 사상가들은 실존이란 세계의 문고리를 잡고서도 확 열어 제끼지를 못하였다. 그것은 약간의 두려움과 자신이 추구하는 분야를 벗어나야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임마누엘 칸트의 이성이란 개념을 두고서도 논쟁이 많았으니! 비판가들이 칸트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이 주장하는 이성이란 무엇이냐? 보여줄수 있는 것인가?
그러자 칸트는 보여줄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존재하고 있는 것이냐? 그렇다. 라고 답변하였다.
이처럼 실존은 이성이란 다른 이름으로도 표현되기도 한다. 실론세계의 완전성을 대표하는 개념을 칸트는 이성이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다.
철학자인 칸트가 꿈구었던 이성이란? 철학이였을까? 신앙이였을까?
아마도 칸트는 그부분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신이란 신앙이란 인간의 창조물이고 창조세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간이란 존재로서의 본질적 한 부분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으니 일견함으로써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칸트는 부친이 목사였고 그 자신도 개신교도 였으니 그 사상이 이성이란 언어로써 체계화 되기까지 사상적 깊이를 더해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