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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만나는 법

레밍턴21 2022. 5. 10. 04:23

세상 사람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인식의 방법은 무엇일까?

일본인들은 모든 것에 신이있다 여기고 사마! 라는 말을 사용한다.

야스쿠니 신사를 보면 사람들을 신으로 모시고 섬긴다.
만물들에도 신이 있다고 여기는 일본인들에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신이란 기본적으로 정신이다.
마음에 신이 임하는 상태를 신이라 여기는 것이다.

정신이란 고요할 정에 신이 임하는 것이다.
고요함이란 마음의 근본상태를 이르는 것이다.

마음의 뿌리가 고요함인 것이다.
명상의 상태다.
기도의 자세다.
간구의 모습이다.
관조의 모양이다.

내 의식의 흐름이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인식하는 시발점이 바로 마음인 것이다.

결국 우상숭배하는 자들의 기본 모습이란!
마음을 모르기에 단지 외적인 신의 모습에란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그리고 여호와가 광야에서 왜 그리 분노하고, 또 분노하였는지를 성경엔 기록하고 있다.

서양의 인식으론 자신의 마음을 뿌리부터 인식하고 추이하는 과정을 갖기가 쉽지 않았을 터이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라는 획기적이고 입지전적인 인물이 성서의 예언처럼 출현하게 되었다.

그는 오랜 사생애의 기간을 밑바닥부터 경험하며, 대제사장 사가랴의 아들 세례요한과는 다른 길을 걸어오게 되었다.

목수의 아들로서 태어나 탄생부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도피하며 연명하였던 것이다.

8살 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아이가 무엇이 그리 고달프고 인생이 힘들었던지!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고 자기가 있어야할 곳에 있을 뿐이라는 말을 하였던 것일까?

결국 그는 사명을 선포하고 공생애의 삶을 살기전 세상 곳곳을 떠돌면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도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깨우치기에 이른다.
즉, 마음을 명상의 토대로 삼고, 신에 이르는 정신을 알아가고, 간구하며, 관조에 이르게 되었다.

그 관조의 상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여서 결국엔 자신이 하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었다.

종으로만 4천년을 보낸 이스라엘 민족을 죄속에서 고통속에서 허덕이게 만들었던 그 속박을 끊어내는 구세주로 부활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존재자를 일컫는 말이다.

기름을, 올리브유를 들이부으면 그리스도가 되는가?

기름이란 생각이다.
자신의 마음에 신의 생각이 임하는 것을 뜻한다.
마음존재에서 생각존재로 변화해가는 것이다.

아담은 기름부음을 받지 못했기에 그리스도가 되지 못했던 것이고!
근본된 토지를 갈았던 것이다.


창세기 3장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아담이 살아가더 지역의 경작지를 일컫는 것일까?
마음이란 아담의 가치관이자! 현실의 고통인 것이다.
그것이 그의 근본된 토지인 마음이다.

그의 마음엔 현실이란 세계가 냉혹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신이 없는 그의 마음상태이다.

생각이란 신의 모습을 더이상 찾을수가 없는 것이다.
신이 떠난 아담의 마음상태다.

스스로가 두려워서 신을 찾지를 못하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죄속에서 근본된 마음속에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후 시간이 흐른후에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되다.

창세기 4장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 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아담 ---> 셋 ---> 에노스 >

사람의 마음은 인식의 근본 도구다.
과학이란 마음에서 인식해가는 방법들이다.

자연과학만 과학이 아닌 것이다.
사회과학 / 인문과학도 과학인 것이다.

과학이란 탐구이며, 인식행위다.

마음을 도구로 삼아서 무엇을 알아가고,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만유인력의 고전물리학에서 양자이론이란 세계로 이어진 것이 불과 1990년대에 이르러서다.

사람의 마음이 그러하다.

자신을 가두는 도구가 되며, 자신을 속박에서 끊어내는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

인식이란 세계는 본디 양면성의 세계다.

하여 마음에서 인식하는 신이란 존재도 결국엔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양면성으로 다가올수 밖에 없는 것이다.

두려움이란 회피의 대상이며, 부인의 모습이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사랑의 대상에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3번이나 부인하지 않았던가?

마태복음 26장
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결국 신을 만나는 방법은 마음속에 두려움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에대한 징벌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회개함으로 죄된 인식상태를 벗어나야한다.

하여서 신을 만나고 천국에 이르기 위해선 회개부터 해야한다.

[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라! ]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랑이란 화두를 남긴채 십자가로 신약의 역사를 매듭지을수 밖에 없었다.

시대가 악하기에 하나님께 용서를 대신구하고 2천년을 기약하며 승천하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소망을 예수의 재림인 것이다.
헌데 오신다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휴거된다고 하니!
구름에 태워서 가는 줄로만 알았고, 신비론자들이 사회적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사랑의 모습이다. 사랑의 형태다.
그래서 우린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이있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다시 오신다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란?

어떠한 새로운 개념의 발전되고 첨단의 사랑일지를 깨우쳐야한다.

마음에서 길이 보이고, 사랑도 보이는 것이다.
1천년 혼인잔치를 한다는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사랑을 깨우치면 신을 찾을수있고, 부를수 있고, 만날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