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이루며 살아가다 어느 순간 어려움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그 사랑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 사랑이 식을땐 사람은 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미운정.고운정 다 사라지면은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보편적 인류애로 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반대만 하지 않으면 내 편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 학문을 배우고 신앙을 가지며, 심지어 그러한 가르침을 주는 위치에 선 사람들도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부부가 다투고 싸우고 심지어 이혼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편적 인류애란!
원수를 사랑하라! 는 말씀과도 같다.
사람이 사람의 탈을 쓰고서 사람의 행세를 하니!
사람으로서 대해주는 것이다.
육신이라는 사람의 탈을 쓰고 있기만 하면
사람의 기본 예우를 해주는 것이다.
슈바이처 마더테레사 등등
보편적 인류애의 표상들이 꽤 있다.
헌데 사랑하는 사람인데 대해주는 것을 보면 아연실색하는 경우가 있더라!
아내가 남편에게 국을 3일치, 심한 경우 1주일 동안 같은 국을 그것도 한번에 조리해놓는 경우다.
제네바 포로에 대한 협약에 따라 원수인 포로들에게도 1주일 식단을 세워놓고서 끼니때마다 바꾸어 가면서 식사를 대접해준다.
나는 과연 내 배우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사랑하지 않는 다는 뜻이 아니다.
사랑을 하지만! 차원적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차원적으로 깊이 사랑해야 했으나!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해버린 그들의 뇌로선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사랑엔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대목을 하나님께선 심히 안타까워 하셨다
창세기 3장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귀찮다고 행하기를 꺼려한다면 그 사람의 뇌는 항상 거기에서 머무르다 끝나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근본은 바로 마음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서 타락과 구원도 좌우되는 것이다.
도의 세계에선 마음의 근본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좋고/ 싫고란 바로 사람의 인식에 대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때 그들의 뇌엔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버렸다
그들은 눈이 밝아지게 된 것이다.
내 자신이 해야할 일을 두고 귀찮아서 미룰때면 타락의 근성이 나를 붙잡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선악을 다스리는 일은 바로 자신의 인식에 달려있다
좋고/싫고를 판가름하는 내 인식의 벽을 허물 수 있다면
하여 도의 세계에선 무선악이라 한다.
선도 악도 상대적이고 기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림으로써 선악을 나누지만!
그 뜻을 헤아리는 것 조차도 자신의 인식안에 있음을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세월만큼 주관이 생긴다.
그러하니 주관이 없을 수는 없으나!
사람의 삶이 변화에 있지 아니하면 주관이 굳어지는 것이다.
변화란 다른 말로 차원을 의미한다.
신과 인간의 사랑도 시대마다 차원을 높여온 것이다.
그 시대적 차원성을 깨달아 보면 모세와 예수님의 그 생각차원이 다르지 아니한가?
태양빛과 반딧불의 차이만큼 전혀 다른 것이다.
진리도 차원성이다.
구약의 성경도 구약인들이 깨달은 것과 신약의 성경을 읽고서 그러한 변화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천지차이인 것이다.
하여 예수께선 말씀하시길!
마태복음 5장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구약 4천년 그들의 신앙은 온전하지 못한 역사의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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