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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유명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사람은 누군가의 생각속에서 영원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죽는다 혹은 산다.  
이것은 사람의 심장박동과 뇌사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에 대한 문제는 영혼의 문제이다.

세례요한 그는 대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시대에 태어나 사람으로서는 더이상 크다 할수 없는 위치에 올라 시대를 / 역사를 깨우는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메시아란 신적존재로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존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인간의 노력으로 시대를 깨닫고 그 시대에 태어나 가장 가치있는 삶을 살아간 사명자였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가 오실때에 내가 그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면 그 얼마나 벅찬 감동일 것인가?

마태복음 11장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 보다도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2.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요한 그는 사명자로서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가 오셨어도 알아보지를 못했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을 두고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왜 일까?

메시아를 알아보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였을까?


마태복음 11장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일생을 메시아를 맞기위해서 예비하던 세례요한은 옥에 갇히고 누명을 쓴채로 곤고한 생각에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물었던 것이다.

[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요한은 과연 광야에 왜 나갔을까?

예수께선  성경에 예언된 구절을 언급하시며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옥에서 죽어가면서 까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라는 한마디를 못남긴채 허망하게 죽었다.

그가 죽은 이후로도 400년간 그 무리들이 존재했었다하니!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사건 이후로도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세례요한은 그 시대 유대율법과 신앙에 관하여 최고의 지성을 지니고 있었던 자이다.

그러한 사명자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실족을 하였으니!

[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

성경의 구절이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해석이 안되는 구절들이 많다.


시대 사명자가 말씀의 피리를 불었어도 환영하지 않았으며, 사명자가 십자가의 길을 감에도 슬퍼하지 아니함을 두고 지적한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제사장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이시대 기독교인들이 가야할 방향이란 무엇일까?

과거 신약역사를 통해서 그시대 사람들의 인식에 어떠한 문제점이 있었기에 시대 사명자가 왔어도 알아보지를 못하였는지를 각자가 깨달아야 한다.

구약의 종이란 개념은 4천년을 흘러서 체화되어 온 것이다.

그 개념이 아들이란 개념의 등장으로 거센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의 뇌리를 흔드는 예수의 말씀은 적 그리스도였을 뿐이다.

사람의 인식관이란 그리 무서운 것이다.

무지가 사탄인 것이다.

신약 2천년의 역사가 흘러왔건만!

주의 종을 운운하면서 기독교 역사가 흘러오고 있다.

과연 주의 종이 그리 위대한 개념일까?

하나님은 성경에 말씀하신대로 내 종 모세와! 처럼 내 사랑하는 종 베드로와!  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실까?

누가 종에게 사랑하는 누구야! 라고 말할까?

종은 충성할 뿐이다. 그리고 그 충성의 대가로 삯만 지불할 뿐이다.

하지만! 아들! 아들은 다른 개념이다.

독생자에겐 그 모든 소유가 전해지는 것이다.

신약 2천년을 통해서 아들로서 체화되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과연 그러하였던가?

아직도 주의 종이란 강박관념속에서 모세의 그 위대한 신앙을 추종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시대에 눈을 뜨고 시대를 하늘역사의 뜻으로 바라볼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벅찬 일일까?

지성으로 감성으로 그리고 영성으로 제대로된 인생의 길을 갈수 있다면 얼마나 희열일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뜻은 종에 있지 아니하였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도 못한채!

만물로서 제사지내듯이 하나님께 종처럼! 나아갔던 것이다.

어느 누가 사랑하는 자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힐까?
종이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세례요한도 한심했던 것이다.

가죽옷이 머가 좋다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타락한 아담의 흉내를 내고 살았을까?

마태복음 3장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그러한 구시대적인 인식에 사로잡혔으니! 끝이 그렇게 되었다.

결국 세례요한도 구약의 인식관에서 제대로 벗어나지를 못한채로 사명을 했던 것이다.

고전물리학의 개념으로 과학을 하던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미시세계의 개념을 받아들이까지!

그 얼마나 살벌한 설전이 있었던지!

그것이 학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앙에 대한 구원에 대한 이슈라면?

이 글을 읽으면서도 아들이란 개념이 관념에만 그친다면 혼적 이해에 머무는 것이고!

벼락치는 충격으로 뇌리가 흔들린다면 영으로 깨달은 것이다.

고전물리학을 4천년간 믿어온 과학자들에게 시대의 천재과학자가 양자역학이라는 혁명적인 이론을 들이대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인간과 하나님의 창조관계를 주종관계로 인식했던 것이고, 예수께선 아버지와 아들로서 인식했던 것이다.

독생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1장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율법이란 종에게 강요된 의무이고, 은혜와 진리라는 것은 아들에게 허락된 권세이다.

독생이란 자유의지를 의미한다.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구약은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없다.
율법이란 가혹한 의무와 책무속에서 시달렸다.

지킴으로서 받는 것은 없고! 어김으로서 가혹한 형벌만이 있었기에!

더군다나! 이제는 신약의 2천년 역사도 지났고, 오신다던 예수님이 오실 기간도 지났다.

그럼 무언가? 새로운 개념이 도래해야 할 것이 아닌가?

2천년을 아들로서 가르쳐왔는데!

이제는 그 차원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이 한차원 깊어지는 것이 이치라 할 것이다.

그것을 혼인잔치라 불렀다.

그 혼인잔치의 핵은 사랑이다. 성경엔 기름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신랑을 맞이하는 핵은 사랑임이 확실하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물었던 그 구절!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신랑은 신부된 자에게 사랑을 묻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