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두 갈래의 길이 있으니!
자유의지에 의한 길과 뜻을 따라 가는 길이다.
최종 결정은 자신이 내리고 그 길의 과정도 본인이 감당해간다.
사람이 태어나서 경험하고 느끼는 모든 세계가 자신의 마음을 이루고, 그 가운데 의지를 세우니!
그것을 자유의지라 부른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것은 자유의지를 세워가는 길이고, 나름 주변과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할 때가 되면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가도 받는다.
공자께서 학문을 탐구하는 자들에게 지천명이라 표현하였던바!
30에 이립하고, 40에 불혹하며, 50에 이르러서야 하늘의 뜻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자유의지에 따라 일심으로 맹진하여 유혹에 흔들리지 아니하고서 살아갈때 드디어 하늘의 뜻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라!
사후의 세계와 신의 존재에 대하여서는 알지 못한다고 선을 그은 공자께서도 하늘의 뜻에 대하여서는 강조하였다.
사람은 누구라도 일가를 이루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목적과 결과를 이루게 되었을때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하늘의 뜻을 깨닫고 그 역사를 펴셨음이다.
그러고 보면 하늘의 뜻은 항상 존재해왔지만!
그 뜻을 깨닫고 이루어줄 사람과 역사는 때에 따라 도래하였던 것이다.
구약역사에 수많은 시대인물들이 있어왔고, 신약에 이르러서야 대망의 메시아가 이 땅에서 나타난 것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주관권에서 살았지만!
한 부류는 유대인의 율법이라는 그 길을 유전으로 자부심있게 지켜왔던 것이다.
반면에 한 사람은 그 율법의 틀을 깨고서 자유의지로서 뜻을 세우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더욱 깊이 깨달았을 때에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설파하고, 자신이 가는 그 길이 아들역사임을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11장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새로운 시대와 역사를 알아가고 깨달아가기 위해서는 그 시대 사명자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고 그와 일체되어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하니! 12사도라 불리웠던 당대의 제자들이 예수라는 화목제를 통하여 각성될수 있었던 것이다.
신약역사의 행적을 통해 구원의 길을 간다는 것이 그와같이 고생되고 험난한 여정임을 알고있는 바이다.
세계 여러곳의 오지에 가서 신약의 복음을 전하고, 심지어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사역을 하시는 분들도 있다하니!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위대한 사역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전세계가 인터넷으로 하나되어 가리고 가려도 세계 곳곳에 진실들이 퍼져나가고 있는 이 세상이다.
문명이 있는 어느 곳이라도 복음을 전하기엔 한결 수월해진 상황이라 할 것이다.
물리적인 복음의 역사가 한 세대 흘러갔고, 영적인 깨달음의 복음역사가 새로이 도래하고 있음이다.
심지어 물질의 천국인 미국에서도 사이언톨로지라는 이색적인 교파가 나와서 영적깨달음과 일체됨을 강조하며 그 교세를 펴나가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란 비단 중심섭리만을 따질 것이 아니라!
방계섭리도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방계섭리가 차지하는 비중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의식 수준의 함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정도는 마소도 다 아는 지식의 범주에 속하며 상식에 이른다는 뜻이다.
창세기 4장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유대교는 당대의 중심섭리 였었고, 이슬람교는 방계섭리였다.
갈라져 나오게 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진전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함으로 중심섭리의 핵을 알지 못한채로 상식의 수준에서 그 시대급으로 자력갱생의 도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하다보니!
나중에 마호메트라는 걸출한 선지자가 출현을 했으나!
방계섭리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러한 연유로 그들의 경전이란 것이 좀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들이 많다.
인간의 욕망, 마음세계를 다스리기 보다는 부추기고 그것을 영적으로 희화시키는 것에 몰두한 모습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유대교라는 것도 당대엔 최고의 영적감성을 지닌 교파였을 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주변 방계역사들이 각성하고 깨달아가 가다보니!
그들의 영적지성이란 것도 한낱 유물이 되어서 빛이 바래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새로운 것을 찾으신다는 뜻이다.
새로운 역사가 온다면 반드시 무언가 새로운 개념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7장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너무 심각해지는 것 같으니!
각자의 인생길을 생각해보자!
인생의 진로를 두고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채워지다보니!
마음속에 내 의지가 무엇이였나를 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내 혼적지성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관조할 수 있게 나름의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로 내 인생의 가야할 길이 무엇이고, 혼으로 영으로 배우고 알아가야 할 분야들도 깨닫게 되었다.
인생의 길이란 그러하다.
작게는 진로가 되고 크게는 목표가 되며, 초월적 의지를 지니게 되면 하늘의 뜻길도 가게 되는 것이다.
그 초월적 의지란 자신의 혼이 바라고 원하는 세계이며, 가치추구의 길인 것이다.
종국엔 그 안에서 보람을 느낄수 있느냐/ 없느냐 피부로 와 닿을수 있어야 한다.
왜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물을 흡수하지 못한채 몸에 들이 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영적 곤고는 육적 곤고이고, 육적 곤고함은 혼적인 세계에서 좌우되는 것이다.
혼이란 육과 영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이다.
그 관계성을 설정해주고 조율해주는 혼의 역할이 마비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곤고함인 것이다.
신앙을 평생의 업으로 추구하는 성직자들도 유혹에 빠지고 돌연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유와 원인이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기 전에 자신의 내면부터 파악하고 다가서야 하는 법이다.
그것을 진실되다고 표현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채 신에게 다가설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지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신은 인간내면에 투영되어 형상화 될수 있을때에 실체로서 피부로서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을 가면서 왜 진로 때문에 고민을 하고, 신앙을 하면서도 곤고함이 줄어들지 않는지?
영과 혼과 육의 경계에 설수 있고 바라보고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면..
성찰이니 관조니 자아발견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또 신학을 전공하고, 몸을 혹사시켜가면서 고행과 봉사활동에 몰두 하지 않더라도
신은 주변에서 내안에서 형제에게서 오고 가심을 깨달을 수 있다.
곤고함을 느낀다는 것은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이며,
살아가려는 영적 생존본능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보시는 것이다.
선의지란!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고, 그 애착이 없는 사람 또는 짐승은 하나님께는 결코 선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을진대!
인생의 두 길이란 결국 생명과 멸망의 길을 자유의지에 따라 찾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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