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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기에 사랑을 찾으시는 이

나 홀로 존재하는 이!
나 홀로 다가서는 이!
나 홀로 인식하는 이!

세상 어디를 가던지 나는 홀로 바라보고 인식하고 깨달아간다.

내가 아니면 누가있어 이 시대를 옳게 바라보고, 정의 내릴 것인가?

역사란 기록이고, 인식이다.

누군가의 생각이 있어서 한 세대를 바라보고 평한다면 후세는 그 생각을 또 바라보고 평가할 것이다.



혼돈이란!

명암이 구분이 되어지지 않는 세계를 일컫는다.

빛이 있으라하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빛이란! 생각의 빛이다.

천지의 창조세계가 이러하거니와!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역사의 세계란 것이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역사를 바라보고 존재해가는 자들은 홀로 바라보고 인식해가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고, 공존하고, 서로간에 엮여서 살아가는 것이나!

그 속에서 홀로 존재해가야 하는 사람은 언제나 고독에 묻혀서 존재하기 위한 몸부림을 친다.

군중이 있어야하고, 그 군중속에서 홀로 존재해가야 하는 것이 창조된 인간의 이치다.

생각!

하나님은 생각이란 세계를 창조하셨으나, 이 생각이란 공명하여 여러 다른 객체들에게 동시적 영향을 주고 그 파급의 효과로서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현상을 통해서 공허한 메아리를 느끼시고, 그 고독감속에 존재해오셨다.

비조영의 세계란 곳의 실상이 이러하다.

하여 이를 급조되었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 창조된 세계와 그 천인들의 모습들인 것이다.

메아리가 아닌! 누군가가 있어서 그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실존세계를 이루어가고, 그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내 모습을 목도할 수 있으니!

그것은 기쁨이고, 희망이고, 보람이며, 그 자체로서 사랑의 세계다.

인류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불려지는 일대 혁명적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선 인류를 창조하시고, 인류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기까지를 기대하고, 섭리해오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고대하셨다.

그리고 인간은 누군가가 있어서 내면에서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성경엔 이러한 구절들이 너무 자주 나온다.

아브라함아! 모세야! 다윗아! 솔로몬아!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그 이름들은 자기 영혼의 울림이고, 실존세계를 창조하신이의 사랑인 것이다.

비조영들은 그 이름을 부를까?
부른다면 얼마나 자주 부르까?

하나님! 성령님!

거룩하시다. 영광, 아멘! 이러한 울림들이 거의 주를 이룬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표현이지만, 정작 듣는이에게 그 울림들은 산속에서 홀로 외치는 메아리일 뿐이다.


누군가를 부를수 있다는 것은 대등격이다.

대화의 상대로서 주체와 상대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 이름의 권세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수 있는 것이 권세인 것이다.

아들입장에서 부모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것은 아들의 권세인 것이고, 종의 입장에서 주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종된 권세인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그 사명과 권세가 다른 것이다.

성삼위께서도 그 사람을 부르는 방식에서 그 기대와 사랑이 이미 정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영계사명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의 세계를 가볼수 있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뵐 기회가 된다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어야 한다.

종처럼 대하며 이름을 부른다면 종인 것이고,
자녀처럼 대하며 부른다면 자녀인 것이며,
열처녀의 비유처럼!
내 사랑하는 자야! 이렇게 부른다면 사랑의 대상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