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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는 시대의 차원성을 타고 온다.

예수께서 가장 많은 힐문과 비난을 당하셨던 것이 네 선생은 어찌하여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느냐?

사실 율법이란 죄를 지은 인류가 하나님께 탕감과 형벌을 받는 기간의 근신하는 행위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근신하는 삶의 수칙을 쭈욱 나열해 놓은 것이다

이미 한번 죄악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툭하면 죄를 짓기 쉬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라!/하지마라! 딱 두가지의 행위의 준칙만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 구약역사의 차원이었다.

헌데 이러한 정언명령의 논리구조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펴기엔 맞지 않았다.

마치! 비유를 들자면 이러하니!

부잣집 주인에겐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양자를 들일까도 생각했지만!
자신의 사상과 생각의 세계를 잘 이어서 가문을 한차원 번영시킬 수 있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래되고 나이먹은 종들은 제쳐놓고 나이가 어리고 생각의 차원이 유연한 종들중에서 데려다가 교육을 시키고 자식으로 삼았다.

예수께서 바라보시었던 유대족속들은 뼈속까지 종이었다.

말 그대로 삯군 목자였던 것이다.

일을 하는 종이었고, 하나님을 대하는 것도 외식과 형식으로 힘들여 노력하는 하나의 노동행위 였을 뿐이다.

그러하니! 구약역사 속에서 다윗처럼! 다정다감하게 하나님을 대했던 중심인물도 없었다.

그러한 다윗의 뿌리에서 한 줄기가 나와서 예수라는 신약역사의 생명의 나무가 자라난 것이다.

신약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이시대 기독교인들중에 아직도 주의 종을 운운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좀더 오랜기간 육신으로 동행하셨으면 그 용어부터 싹 뜯어 고치셨을 것이다.

화평케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으리라!

이런 아들됨의 조건을 자주 말씀하셨다. 그래도 생각차원이 따라가지 못하니 주여! 주의 종이! 이런식의 표현속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그러하다보니 그들의 인식관도 종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를 못했던 것이다.

왜 예수님이 위대하신 분인가?

그 차이점이 무엇인가?

인류를 종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해방시키신 사명자이고, 십자가 희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을 지켜내신 존재자다.

신약의 역사가 2천년이 이미 흘러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종국엔 그 오래된 부대는 터지게 되는 것이다.

율법을 폐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하시었다.

구약 4천년간의 율법을 두 가지로 핵심요약 하셨다.
첫째,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둘째, 그와같이 네 형제를 사랑하라!/
이렇게 행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 것이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틀로 죄인된 인식으로 하나님도 형제들도 대하지 말아라! 가르치신 것이다.

그래서 용서와 화평을 그리도 강조하셨다.

아들의 행위들을 몸소 보이며 가르치셨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을 보시고 죄없는 자만 치라!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여 주어라!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쪽까지 대주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도 주고, 오리를 동행하자고 하면 십리까지 동행해주라는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나온 인류는 새로운 족속인 것이다.

구약이란 뿌리에서 나왔지만!

신약인들은 구약인들과는 전혀다른 신인류들이고, 새로운 족속인 것이다.

인류역사의 진화를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더라도 그러하다.

크로마뇽인 부터 호모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각각의 인종들이 명멸해오지 않았는가?

유대인들은 영으로는 이미 구시대속에 버려진 유물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이 일월성신을 섬기는 미신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기대섭리는 그렇게 막을 내린 것이다.

신약역사 2천년이 다 지나갔다.
아직까지도 아들의 개념을 못잡으면 그러한 자들이 가는 영들의 세계는 개념을 못잡은 자들이 존재하는 영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과학분야를 보더라도 16세기/17세기/18세기/19세기 천재과학자들이 이시대 고등학교 학생의 과학수준을 따라올 수가 없다.

알고 깨닫는 것이 이리도 크다.

그것을 가능케 한 존재자가 예수그리스도다.

베드로도/사도바울도 아들급 구원역사를 제대로 깨닫지를 못하고 역사를 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한이 많았다. 예수님께 직접 배우지를 못했다

베드로등이 학문이 짧다보니! 아들개념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못했다.

먼가가 있는데, 그것이 살아생전 예수님과 한두마디만 나누어보면 확실할긴데.. 그게 생전동안 안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사도바울처럼 학식이 있고 기존성의 유대신앙에 지식이 있었던 자가 예수님 당대에 곁에서 3년을 배웠다면 신약역사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수제자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바라셨던 것은 딱 하나!

사랑이였다. 언젠가는 깨우치려니!

그 사랑이 종의 그것이 아닌 아들의 사랑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을 것이다.

엘리야를 구약인들은 크게 여겼다. 왜?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래서 엘리야가 다시오면 그때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오실것이란 굳은 믿음이 있었다.

헌데 정작 온것은 세례요한 이었다.

그 심정과 사명으로 온 것이다.

그 정신과 사상을 지니고 세례요한이란 새로운 버전으로 온 것이다.

근데 업데이트과정에서 테이터전송의 오류가 있어서,핵심코드를 까먹었다.

그래서 미션의 핵인 그 시대의 메시아증거를 하지 못했다.

예수께선 그들에겐 하나님인 것이다.

구약이란 땅과 하늘에서 신약이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인식의 땅이고, 사랑의 땅이고, 평화의 땅이었다. 그리함으로 새 하늘에 영광의 하나님을 볼수 있었다.

시대의 차원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은 졍녕코 이루시는 역사를 펴신다.
돌이킴이 없으시다.

밥을 떠 먹여주어도 먹을 마음이 없으면 씹지 않을 것이고, 먹을 마음이 있다면 야채밭을 가르쳐주기만 해도 뿌리째 뽑아먹을 것이다.

구원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가 돈을 주고 받고 파는 경제의 논리가 적용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들어도 보아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을!

누구에겐 허락되고, 누군에겐 허락되지 못하는 것이 구원의 세계임에 안타까움만이 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