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면서 경험에서 배우면서 삶의 지혜와 슬기로움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다.
배우기 위해서 생활을 하는 것과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배우게 되는 것들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연스러움!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인위적인 관계성을 두고서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타산일 뿐이다.
내가 너를 이만큼 생각하고 배려를 해주는 과정속에서 너도 나에게 최소한의 이해와 배려를 해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랑의 범주를 넘어서게 된다.
신앙이란 것도 배우기 위해서, 신앙하기 위해서 생활을 해나간다면?
그러한 조건명제 아래에서 신앙이란 이미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고, 삶과 조화를 이루며 신앙의 세계를 알아가고 배워가야할 부분들이 신학의 영역에만 머무르게 되어버린다.
유대인들의 우를 이시대에 다시금 범하게 되버린다면 주님의 재림과 휴거에 대한 역사는 또다시 인간의 주관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엔 혼인잔치의 비유를 들어서 자연스레 사랑이란 단어를 언급하였던 것이고, 거기에 슬기라는 단어를 추가하여서 사랑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져가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단순하고 명확하게 다가오는 것이지만!
세상사가 그리 간단하지만 않은 것이다.
지혜나 슬기라는 단어를 떠올릴때 유대제사장들이 생각하는 그 관념의 기준선과 현 기독교 성직자들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일반 상식의 범주에서 생각하는 사고의 개념들이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성경의 예시를 들어보면..
마태복음 11장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것을 예수께선 명시하셨다.
그들의 인식관이 그들의 주관이 어떠함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진실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진실되고 솔직하다. 남을 이용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꾸미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순수하며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인식할수 있는 것일지도!
그러하다면 이쯤에서 슬기라는 단어의 개념을 스스로가 유추할수 있을 것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수도 있는 것이다.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친다한들!
사랑의 대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면 찾았어도 찾은 것이 아니요!
보았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였기에!
그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것이리라!
계시란 느낌이다. 그 느낌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아들의 계시란 아들의 사랑느낌인 것이다.
열처녀는 신랑을 맞이하는 사랑의 느낌/ 사랑의 감각이 살아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느낌이 무디어져 있었다.
졸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추억이고 기억일 뿐이다.
사랑이란 현재진행형이고, 지금이 아닌 것은 실연인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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