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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란 세계

느낌!

느낌을 글로써 표현한다면 쉬운일은 아닐 것이다.

서로간에 사람이 느끼는 감정들을 명확하게 정리한다는 것도 쉽지 아니하듯!

남녀가 서로에게 느낌을 확인해가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썸인가? 아닌가?
썸이라면 어떠한 뉘앙스인가?

친근함인가? 낯설임인가?

친근함이라면 익숙함인가? 편안함인가?

낯설음이라면 색다름인가? 겉보기와는 다른 이중적 느낌인가?

뉘앙스를 한마디로 정의내리는 것은 속단이 될 수도 있고, 위험성을 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오묘한 것을!

예수께선 이러한 사람의 오묘한 마음을 두고서 여러 설교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물며!
전능자의 마음이랴?

인간은 신의 의중을 헤아릴때에 심정세계라 부른다.

심정이 통하는 세계가 있으니!
그 심정권안에 다가서기 위해서 마음을 비우고 주관을 버리기 위해 애쓰고, 실천의 행위로서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보기도 하는 것이다.

남자가 여인을 사랑함에 있어서 지혜롭고 더 나아가서 슬기롭기까지 하다면 대부분의 남자는 그 여인의 미색이 부족함에도 마음에 기뻐함으로 그 여인의 사랑을 구하게 될 것이다.

지혜란 방향성이고 슬기란 구체적 방법론이다.

구약의 지혜란 종이라는 방향성이고,
신약의 지혜란 아들의 방향성이며,
새로운 역사의 지혜란  방향성이 신부인 것이다.

구약의 예언에는 항상 다가올 신약시대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핵심은 아들이었다.

그것을 구약유대인들이 몰랐기에 사도요한은 예수그리스도는 독생자라고 증거했던 것이다.


방향성을 알았다면 구체적인 방법론도 나와야 하는 것이다.

신약을 준비하기 위한  슬기란 아들로서 나아가는 구체적인 행위들이였다.

예수께선 이제는  더 이상 제물을 드리지말아라!
너희가 온전해진 마음과 행실로 아버지께 나아갈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셨다.

느낌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다.

그래서 직접 몸으로 보여주고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도 당대에 메시아를 만나보고 그를 통해 새시대 역사의 그 느낌을 하루만이라도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신앙은 시대성이 있고, 그에따른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다.

개개의 느낌은 그 사람만의 느낌이며, 그것이 천국을 향해가는  노하우가 되는 것이다.

슬기란 바로 그러한 느낌의 세계를 배워가고 깨우쳐가는 감각의 영역이다.

그것을 말한마디로 정의내려 깨우쳐줄 수가 없는 것이다.

유대제사장들이 왜 지혜롭고 슬기로운 랍비로 불리면서도 정작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그 인식의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던 것일까?

문제의 원인을 알수 있다면 그에대한 답도 바로 도출되는 것이리라!

헌데 이 인식이란 함부로 건드리게 되면 사상싸움으로 번지게 되는 것이고, 그 끝은 양패구상에 이르게 된다.

어느쪽도 승자가 되지못하고 하나님의 역사도 깨져가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도 바로 그러하다.

평생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일심으로 한 길을 왔을지라도!

방향성이 잘못되었다면 인생의 막바지에서 그 길을 돌릴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유대제사장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던 것일까?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겐 오히려 수월하게 다가오는 것이지만, 평생을 한길로 왔던 성직자들에겐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그 괴리감을 무엇으로 메꿀수 있을까?

등불은 기름이 있어야 타오르게 되는 것이기에, 그 사랑이라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그 사랑이란 차원성인 것이고, 차원성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주관에서 벗어나려는 선의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각자의 자유의지안에 선의지를 찾아가는 것!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볼진대!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선 의와 불의의 기준을 삼으실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