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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권 역사의 한계

자녀를 낳고 키워본 사람이라면 양육하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경험했을 터이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만 나아가는 자녀를 보고 있노라면 전생에 무슨 업이 있어서 이리 부모와 자녀로 만났을까?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솟아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자녀권 역사인 신약의 역사도 하나님의 입장에선 참으로 곤역스러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물론 전혀 말귀가 안통하는 구약의 종들시대보단 나아졌다고 할만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근본 심정세계를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정말 깊은 사랑의 차원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고, 그리하면 자녀권 역사의 한계를 실감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 하였을지라도!

왜? 다시 오셔야만 하는지를 깊이 깨닫지는 못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신다는 말에만 몰두 하였다.
그리고 십자가로 떠나신 모습에 너무 가슴아프고, 슬퍼서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하였던바!

예수께서 부활하신바되고 제자들에게 나타난바 되었기에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역사로 흘러온 것이다.

그러한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성경상의 증거는 2천년이 흐르면서 살아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증표로서 의미를 부각시킨 것이다.

그리하다보니! 정작 왜 다시오시는가에 대한 깊은 연구는 존재하지 못하였다.

혼인잔치에 대한 성경기록은 찬송으로도 많이 불리운바 되었기에 한국 기독교 역사의 부흥기엔 재림에 대한 로고송이 될 정도였다.

그들도 이젠 노년의 연배에 이르러서 그 기억과 추억만이 적막함을 더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되는 계명이라 말씀하신 뜻이 있다.

구약 종의 시대를 거쳐서 신약 아들의 시대를 지나, 마지막 신부된 조건의 역사까지를 의미하신 것이다.

사랑이란 끝까지다. 최종 목적지를 가지 못하면 어느 한쪽의 짝사랑으로 끝나는 것이다.

창세기 아담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담이 중간에서 멈추었기에 그 사랑이 짝사랑이 되버린 것이다.

예수께서 펼치신 하나님의 역사란 이미 예정된 시대급 구원이 명확했다.
바로 아들됨의 역사였다.

신약 2천년을 확정시키는 역사인 것이고, 구약과의 차별성이자 신약역사의 한계선인 것이다.

구약에서 갓 벗어난 시대역사에서 신부됨의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란 무엇이 되었을까?

사람의 인식이란 참으로 오랜 시간동안 형성된 인류역사를 통한 경험의 소산이다.

그러한 시대마다의 인식들이 어떠한 강권적인 역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뒤바뀔 수가 없는 것이다.

중남미의 선교도 무력을 앞세운 일방적인 혼혈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의 영향으로부터 지켜낼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역사의 인식이란 인정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것이다.

똑같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역사를 펴러왔다고 증거하자 유대인들의 반응이란!

참람하다 어찌 인간으로서 그런 말을 하느냐? 바로 이런 것이였다.

지금 이시대에 내가 성자의 신부된 입장으로 구원역사를 펴러 왔다고 증거한다면 그 누가 제정신으로 볼것인가?

사람의 인식이란 항상 그렇다.

영을 이야기하면 항상 육의 인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그러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가 어디있느뇨?

그러자 해롯은 2살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였다.

왜일까? 육으로 인식한 것이다.

영적인 의미인 것이다.

신약 아들역사도 육으로만 인식하고, 그 인식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였으니!

기독교의 재림과 휴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영으로 이루어지는 재림과 휴거역사도 맞이할수 없는 이치다.

사도 바울!

베드로의 증거와 그외의 제자들의 증거가 있었고, 성경에도 기록된바 되었다.

하지만! 지금 신학에서 그 깊이와 가치를 더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도 바울의 성경기록이다.

왜일까? 사도 바울은 영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예수를 핍박하고도 일면식도 없으면서 너는 도대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거하는 까닭이 무엇이뇨?

그러자! 성경엔 바울이 더욱 힘주어 그가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영적인 의미를 더 깊이 파악하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의 신앙과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철학적 사고를 양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인으로서 믿음과 철학자로서의 인식이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으로서는 그리스도이지만, 철학으로서는 인간의 생각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의 선구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눈에서 허물이 벗어지고 나니!

예수란 존재자는 시대의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서 그 한계를 한차원 뛰어넘는 역사를 펼쳤던 선각자 였던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증거역사를 행했지만!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역사는 판이하게 달랐다.

영적인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도 바울이였기에 가능했던 역사다.

지금도 그러한 인식에 대한 좋은 예를 볼수 있다.
아마존 밀림에 사는 원시인에게 젓가락을 가져다주고 사용하라고 설명하고 이해시킬수 있다면 그들도 젓가락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자면!
그들에게 위생이란 것!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균이라는 것도 깨우쳐주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쉽사리 받아 들일까?

그래서 인류가 젓가락 하나 발명하고 사용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영감을 받아서 생각하고 깨닫까지의 시간개념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인식전환의 경험치가 필요한 부분이다.

영의 말귀란 알아듣고 인식하기 쉽지 않기에 이처럼!
장황하게 예시하고 풀어보는 것이라!

구약인들이 이루고 있는 영들의 세계에선 하나님이 종이라고 부르시고, 예수님을 믿고 아들된 조건을 이룬자들에겐 내 사랑하는 자녀야! 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들이 영계에서 어떠한 변화를 맞이하지 못하면 모세도, 아브라함도 영원히 종들의 영계에서 존재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고난후 예수께서는 곧바로 옥으로 가신 것이다.

옥이란! 영옥이다.

옥이란 감방? 이런것과는 좀 다르다. 옥이라고 표현함은 바로 시대성에 갇혀서 존재하기에 옥이라고 표현한 영적의미다.
그들에게도 해방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영옥에 가셔서 복음을 펴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일거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군요! 환영합니다. 그리하였을까?

살아서도 믿기 힘들면 죽어서는 더욱 믿기 힘든 이치다.
생각이 멈추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자극을 통해서이다.

새롭게 경험하고 자극을 받으면 인간의 뇌작용인 마음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육체인 뇌가 소멸하면 그 혜택도 소멸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서 하루라도 그리스도와 만나서 대화나누는 것이 그리 큰 축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