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란 같은 핏줄이기에 누구보다 정이 깊고 우애가 넘쳐아만 정상이다.
헌데 같은 집안에서 자라면서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주장하고 분노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를 두고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부모입장에서 형인 가인에게 한 말씀 하셨을까?
창세기 4장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신약은 하나님앞에 같은 자녀권의 역사로서 형제끼리 하늘 역사를 펴온 것이다.
같은 형제이면서도 너무도 잔인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약의 역사가 펼쳐저온 지난 2000년을 뒤돌아보면 서로 죽이고 죽는 투쟁의 역사였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한다.
왜? 우리는 서로가 주안에 한 형제로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느냐?
그러면서 유엔도 조직하고, 세계 평화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역할도 해온 것이다.
공산주의 용어에 동무라는 말이있다.
1.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2.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하는 사람.
즉 육으로 한 혈통은 아니지만! 그처럼 가까이 지내면서 공동의 운명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볼수도 있다.
쉽게 이해하자면! 피한방울 섞이지 아니하였지만, 형제같은 사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동무들을 어찌 대하는가? 가차없이 숙청하고 등뒤에서 칼을 들이대는 것이다.
자녀권 역사란 분명 강력한 역사이고, 파격의 역사인 것이 맞다.
주인과 종의 입장으로 신분이 명백함에도 주안에서 같은 자녀로서 존재해가자는 이념이 얼마나 혁명적인 개념인가?
그러한 이념에 입각하여 신약역사는 신분과 나이와 계층을 초월해서 주의 사랑안에서 통합되어져 온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녀권의 역사는 최종의 목적지는 아닌 것이다
그러기엔 너무도 이해타산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어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선 자녀권 사랑으로 끝내지 아니하시고, 다시오겠다고 말씀하신 뜻이다.
3년반이란 시간동안 해놓았지만! 최종목적지엔 가지 못하였기에 재림과 휴거라는 역사를 펴서 2천년이 지나는 시점엔 다시한번 차원역사를 펴시겠다는 의미다.
그 사랑의 차원역사가 바로 혼인잔치의 역사다.
물론 그러한 혼인잔치의 역사를 펴기 위해선 하늘의 예비하심이 있게되는 것이다.
신약엔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했던 예수그리스도가 있었던 것이고, 새로운 역사의 차원에선 신부된 입장에서 역사를 바통 터치할 사명자가 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역사란 육으로 바라보안선 답이 있을수가 없는 것이다.
하늘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이기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세례요한의 사명역할을 해야하는 사람도 오게 되는 것이다.
신약역사에선 세례요한이 그 사명을 제대로 깨닫지를 못했기에 개인 역사만 펴다가 하늘 본 역사와는 멀어져갔다.
지금 이시대는 어떠할까?
지금도 그러한 수많은 전초역사들이 있어왔고, 명멸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펴시고자 하는 재림과 휴거의 역사란 무엇이길래?
이리도 은밀하게 펼쳐지는 것일까?
성경엔 나와있다.
[다번역성경찬송]
마태복음 10장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정확하게 구약시대에도 이런 역사가 펼쳐진 것이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구약시대의 인식관을 지칭하는 것이고, 의인의 이름이란 신약시대의 사명자를 지칭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칭하는 것이라!
재림과 휴거의 역사는 내가 속해있는 시대인식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주를 제대로 보기위해서는 인공위성을 타고서 지구중력권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재림과 휴거의 역사란 그리 환상적이고, 낭만적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
현실 그 자체로서 자기인식과의 싸움인 것이고, 시대주관권에 대한 도전이며, 개성의 진리체로서 주앞에 나아가는 고독의 길이다.
휘황찬란한 빛을 찾아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발광체로서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기 위한 끝없는 몸부림인 것이다.
오죽이나 그토록 힘들고 참혹했으면 아마게돈에 대한 환상이 그리 비추어졌을까?
중세시대 면죄부를 사고 파는 것이 지금엔들 없을까?
구교와 다르다면 그 생각과 행위가 다를 것이기에!
재림과 휴거를 기대한다면 인식을 달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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