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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말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이는 생활의 언어와 가르침을 구분짓는 표현이다.

밥먹어야지! 이것이 말씀인가? 말인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말도 되고, 말씀도 된다.

도에서는 도즉무언이라 말한다.

도는 깨달음이란 형태도 없고 형식도 없으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르는 길이라 말하여 도라고 하는 것이다.

도란 길이다.

예수께서도 길가에 씨앗이 떨어졌다고 표현하지 않으셨는가?

길이란 마음이다.

하여 사람의 마음이란 길과 같다.

길에선 하는 일이 많지가 않다.

쉬어가는 것이고, 거기서 임시 거쳐정도는 움막으로 지을수도 있겠으나!

집을 짓고 살림을 살지는 않는다.

인생이란 여정이고, 과정이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정형화 되어있는 가치있는 말의 구조라고 볼수 있다.

그것은 서양이란 라이프스타일이 유물론적 사고관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논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이란 형태로 다가서는 것이다.

심지어 석판에다가 새겨놓는다!


신약역사에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다해 사랑하라!
말씀하셨다고 기록하였다.

기존 말씀들을 한마디 말씀으로 통폐합 시키신 뜻이다.

그건 종! 이니까! 생각의 자유가 없으니까!

이젠 아들이니까! 말씀의 핵 하나면 가능하다.

그러나! 이해가 어렵다고 하니!

구체적, 세부적으로 풀어내시는 것들이 말씀이 되었다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을 보는 우를 범하게 되면 달을 보면서 살피려하지 않는다.

보름달인지? 그믐달인지? 레드문인지?

말씀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를 살피어야한다.

마음에서 생각에서 오가는 것이 말씀이다.

길에서 오가는 것이 말씀이다.

생활에서 오가는 것이 말씀이다.

그래서 천.지.인 삼재지도를 모르면 막도문하라!

근본을 모르고 이치를 모르면 도의 문에 들어서지 말게하라는 뜻이다.

그러한 자들이 진리를 운운하게 되면 듣고 따르는 이의 뇌를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타락이란 변화를 멈추게 하는 일체의 행위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그들의 영적 성장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들의 타락이 되었다.

관계성의 타락이다. 관계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사탄은 죽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죽었다.

변화가 멈주었기에 그들의 영은 사망에 처하게 된 것이다.

영이란 생각의 실존체다. 헌데 생각이 죽었으니!
죽은 것이다.

뇌활동이 멈춘 인간을 코마라고 한다.
사망으로 보는 것이다.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여도 인식이 없어서 반응이 없는 것이다.

말속에서 말씀을 캐낼수 있어야한다.

진리란 자구에 얽매이지 아니한다.

구도하는 자들은 누구라도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세상속에서 살아간다.

세상과 동떨어진 삶속에서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세리와 죄인들의 속된 삶속에서 진리의 모양과 형태가 태동된 것이다.

병자들 속에서 의술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태복음 9장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진리의 눈을 뜨이게 하는 일이 어찌 그리 간단한 일일까?

예수께서 다시오시고 새로운 차원으로 진리역사를 펴신다면 알고 따라갈 의인이 몇이나 될 터인가?

예비하고, 예비하라! 신랑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