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투영의 공간이다.
그 안에서 재생이 되고, 뇌의 파장으로 감지,즉 느끼는 것이다.
느낀다는 것이 인식의 단계에 다다르면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자녀가 깨닫기 까진 부모가 되어서 자녀를 양육하고 나서다.
그때는 부모는 실체로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부모에 대한 느낌과 생각들이 공명하듯 뇌리를 스쳐갈 뿐이다.
전능자가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은 이미 스치고지나간 이후다.
인간의 뇌는 어떠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피조물의 잔상을 보고있는 것이다.
빛의 파장이 피사체를 스치고 반사되어 오면 그때서야 피조물의 존재여부를 느끼고 알게되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동행이란 항상 이와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내가 그리도 힘겨울때 하나님은 어떻게 나를 도우셨냐고?
묻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이땅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두고 깨닫지 못한것을 차지하고서라도!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전혀 깨닫지를 못했다.
모세와 함께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를 못하였기에 우상을 만들고 모세와 함께하신 하나님을 불신하였기에!
그들은 가나안으로 휴거되는 역사를 이루지 못했다.
휴거역사차원에 이르지를 못하고, 과정에서 그쳤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신 이후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그 6천년의 세월을 지나오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차원에 이르러 그 생각이 휴거될때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은 영원으로 결실을 이루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깨달음의 순간이지만!
인간과의 사랑이 이루어질때 하나님은 영원을 느끼시고 비로소 하나님께선 그 사랑의 결실을 영이라 칭하시는 것이다.
하여! 이러한 휴거를 영 휴거라 부른다.
내 사랑아! 내 영아! 어디에 있느냐?
죽어버린 영을 두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애통함은 창세기 기록부터 절절하신 것이다.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며, 슬피우는 전능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창세기 2장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다번역성경찬송]
창세기 3장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흙으로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하지만! 흙으로 돌아가는 인류의 첫 사랑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시대의 사명자를 만나는 것이 구원이다.
그를 만나야 영휴거를 이룰수 있었다.
사도바울이 평생을 두고서 영휴거를 고민했다.
사랑의 실체로서 방점을 찍지 못한 것을 두고서 그리도 낙심했었다.
영의 휴거를 이루기 위해선 사명자를 육으로 만나서 생각의 실체를 이룰수 있어야했다.
그 실체가 이미 떠나버린 후 사도바울이 느낀 통한의 뉘우침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떠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길가를 지나다가 돌하나를 주어도 그 가치를 몰라보면 수백억의 수석이라 할지라도 지나치기 마련이다.
시대를 깨달아야 한다.
신약의 역사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60~70년대 기독교 부흥의 역사가 재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은밀한 바람은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성령의 역사는 태풍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어주는 역사가 아니다.
늘 항상 곁에서 함께했던 모세처럼!
이단시하던 나사렛 예수처럼!
인식의 경계저편에서 희망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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