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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의 고뇌

고난의 주와 영광의 주로서 그 양단의 길을 걸으셨던 육체를 지닌 신의 고뇌다.

왜 육신을 가지고 신이 이 세상에 왔을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말이 통하는 육신을 갖기위하여서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잉태를 통한 강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리리!

이런 간절함을 지닌채 4천년 역사의 강포함을 오래참으시며 인내하신 것이다.

헌데 육신을 가지고 와서 대화를 시도하면 말귀를 알아들을줄 알았다.

육신을 지닌채로 신의 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전하면 가능할줄 알았다.

헌데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은 끝까지!/지금까지도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영옥에서 지금도 예수께선 십자가 부활이후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것이다.

3년 반이란 짧은 찬스의 시간이 이미 물건너 가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뇌!

사명자들의 고뇌는 지금까지도 한결같다.

인식! 인식이다!

알아보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알아보았어도!

말귀를 알아듣지를 못한다.

생각차원이 다르고 마음의 차원도 다르다.

시대의 관원이 왜 한명이라도 절실했을까?

바로! 인식의 문제다.

예를 들자면!
최근 천공이라는 도사? 역술인? 무속인?

하여튼 다양하게 불리우는 사람이 있더라!

유트브로 몇편 보았다.

상식의 선에서 차원을 달리하여 사람들에게 풀어주는 사명을 하더라!

헌데 그런 사람들이 기독교가 강성한 한국에서 대통령과 어떠한 연관이 있다는 부분에서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명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보통의 사람들은 간단 명료한 것을 좋아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예수불신 지옥, 믿음 천국!
풀이>
극락과 천국에 가기위해서 부처와 예수님께 귀의해서 극락과 천국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
이런 요지다.

이 단순, 명료한 인식의 세계를 바라는 것이다.

그 기준들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나, 현 대한민국 시민들의 인식기준이 같다는 점이다.

예수? / 사가랴의 아들 세례요한 아하!
바로 이런 반응의 차이에서 인식이 갈리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이 있기에!

시대의 관원 한명이 없음을 그리도 통탄하셨다.

깨달음의 세계와 진리에 왜 그리 목매이는 것일까?

바로 이러한 인식의 오류에서 벗어나 참된 것을 알고싶기 때문이다.

최소한 먹고, 자고, 쉬는 동물의 수준을 벗어나서 인간 본질에 다가서고 싶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존재, 유희하는 존재, 변화를 추구해가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결과 생각의 맛에 좌우되는 흥분과 기쁨의 삶을 누리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왜? 블로그들을 방문하고 글을 읽는 것일까?

바로 생각의 맛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방문해서 시험정보나, 취업정보, 투자정보름 가끔은 얻을수 있겠으나!

제가 글을 쓰는 이유도 근본은 생각의 맛으로서 차원세계를 알아갔으면 하는 바램에서 글을 기고하는 것이다.

생각의 맛이란 개성에서 좌우된다.

생각의 맛이란! 개성의 맛이다.

마태복음 5장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러한 개성의 세계로서 상한 영혼들을 치유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존감!

인간이 개성적 존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해 갈수록 자존감도 소멸되어 간다.

자존감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무엇일까?

종의 자존감?
아들의 자존감?
신부로서의 자존감??

왜 신부로서의 차원역사를 열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을지?

말귀를 알아듣는 것이란!
의지없이는 되는 것이 없다.

Hearing이 아니라! Listening이 될수 있기위해서 생각의 차원을 끊임없이 변화속으로 내몰아야 하는 것이다.

비록 부족하겠으나!

이글을 읽는 분들이 상실감에서 개성적 존재로서의 자존감을 스스로도, 하늘앞에도 찾아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당당하게 글을 쓰듯이!
읽으시는 분들도 누구의 눈치없이!
당당하게 읽고 깨우치시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