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관조의 세계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부분들은 인문학에서 시작하여 자연과학 철학, 역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탐구와 논쟁의 소재가 되어오고 있다.

동물과 인간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가?
생리학과 DNA염기서열의 분류로서 1차적으로 다루고 있으나!

2차적으론 생각과 그 언어표현의 과정도 살피어가고 있다

인도네시아쯤의 어느 섬에는 아직도 신석기 초기쯤으로 추정되는 원시인들이 생존해서 그 종족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신석기라면 도구를 사용할줄 알고,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는 정도도 이해하고 있으며, 사람이 부모와 자식 그리고 부부관계에 대한 인륜의 도 까지는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나름 신앙성도 있어서 초월적 존재인 창조주에 대한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선석기? 신석기라!

아담과 하와의 성경구약에 해당되는 인류의 프로토타입이 실존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서는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수 없다.
아담 하와의 인식과 사고의 수준이 어떠했는지를 비추어 알아볼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학문이란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고!
그 본질엔 인간사고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기인하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인식과 생각의 세계.

하여 그 생각의 기준/ 인식의 기준을 무엇으로 삶을 것인지에 따라 현상의 특성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그러한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관조할 수 있는 자세와 태도 그러한 능력은 참으로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모든 학문의 세계는 관에서부터 시작된다.

관찰이다. 그리고 생각이다 최종적으론 인식이라는 결론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라 할수 있겠다. 하여..

나는 결국 누구일수 밖에 없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상대에 대해서 살피고 분석하고 연구하여도 최종적으로 얻을수 있는 것은 바로 나는 누구이다 라는 개성적 결론에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서 나는 누구이기 때문에 너는 누구이구나! 라는 결론을 얻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러한 인식의 세계를 기대하셨던 것이다.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기대하신 것이다.


개역개정 창세기 2장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상대를 알아가는 기준이 되고, 그 기준에서 상대를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도 이 과정을 거쳐가신 길이다.

그의 길은 구원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였던바!

예수께서 행하신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비단 교회와 봉사활동과 그  커뮤니티를 형성해가는 수단적 도구에 있지 아니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내가 종인지?/ 아들인지?
확실하게 깨닫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시고, 아버지라 부르신 것이다.

이러한 과정과 길은 후대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의 길로 불리운 것이다.

신약의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의 핵은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과 그 증거였던 것이다


사단은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이 떡이되게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등등 육적 잣대의 기준으로 네가 육신을 쓴 네가 어찌 전능자의 아들이 될수 있느냐?

너는 육에 속해있으면서 육신의 구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지 않느냐?

이러한 힐문을 해대었다.

이에 예수께선 나는 누구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신바!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사명을 행하러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명의 길을 갈 것이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나를 살피고, 상대를 살피고, 세상을 살피어서 하나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수도의 과정이고, 삶을 통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임을 몸소 보이신 것이다.

신약인들이 아들급 구원역사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행하였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혼탁하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구약의 유대인들이 종급구원역사를 깔끔하게 끝냈더라면 아들급 구원역사를 반기었을 것이다.

그 굴레의 한계의 차원속에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였에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내몬 것이다.

신약인이라면 구약인이 아닐진대 아들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임에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도 종의 굴레속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할때 주의 종을 운운하면서 교회를 다니면 그것이 유대교인지?/ 신약의 기독교인지?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통렬한 자기반성의 때가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비가오고, 눈이내리고, 날씨가 화창할 것이라는 하늘의 기상을 살필줄 알면서도 하늘 역사의 때를 모른다던 예수그리수도의 탄식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여! 나를 알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구원의 의미가 그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탐구해 갈때 구원의 길이 각자의 삶속에 있음도 느끼게 되는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