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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야 드러나는 법

사람들은 감추어질 수록 더 찾게된다.
신비주의라는 말이 있다.

예수께선 철저히 감추고 역사를 펴야만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했던가?

시대가 악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따르는 자들의 의식수준이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놓고서도 지금까지 말들이 많았다.
기적이다. 아니다.

모 맹신자들은 성경에 왜 해석을 하냐고 반문한다.

그러면 당신은 왜 시를 읽고, 소설을 읽을때에 작가의 의도가 어떠한 것이였나를 염두에 두고 읽게 되는 것인가?

성경이란 인간에게 신이 메시지를 주기 위한 책이다.
나름대로의 차원과 해석을 염두에 두고서 기록한  책인 것이다.

그 자체로서 다의성을 포함하고 문학적 표현과 비유로서 감추고 있는 비밀이 존재하는 것이다

개역개정 마태복음 16장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성경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과 동행하며 겪은 부분에 대한 기록을 해놓은 것과 다른 제자들에게 전해들은 것을 기록해놓은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오병이어에 관한 이야기도 실제로 겪은 제자는 떡으로 축사하시고 말씀전하신 것이 전부인 것을 알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해들은 제자들은 기적이라고만 알아들었다.
사실관계에 대한 파악이 전혀 안된 상태에서 기록되어진 것이다.

하여튼! 따르는 제자들의 인식과 의식의 수준은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동행하면서 문전걸식을 하였으니!
현실의 고난과 사후의 천국이 오버랩되어 힘들었을 터이다.

예수님의 사명도 확실히 감추어졌어야 했던 부분이다.

헌데 예수께선 제자들이 너무도 수준이 모자라고 의식이 박약하니!

베드로에게 물어보신다. 은연중에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개역개정 마태복음 16장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헌데 이렇게 가는 것이 본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주입식의 교육은 무턱대고 들이대는 결과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소문을 냈을 터이다.
그것이 그들의 증거차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스승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왜? 아들인지를 설명해주지 못하고 단순히 그렇게 어설프게 드러내버린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그러한 학식과 교양과 처세가 있었다면 주를 십자가로 내몰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시대 하나님의 아들사명을 하러 왔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할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인식시키고 설명하려 하여도 수준이 안되었다.

종국엔 유대제사장들의 먹이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1. 하나님의 아들???
2. 세리와 죄인과 심지어 간음한 여인까지도 동행
3. 안식을 범함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어설프게 감추고 어설프게 드러내니!
진리의 본체로서의 사명은 희석되고, 단지 추문과 억측의 대상으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끝나버린 것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단체나 똑같다.
따르는 자들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들의 무지함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다.

모자란 제자들을 바라보시고 역사를 펴셔야만 했던 그 심정의 세계를 누가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신약 기독교의 역사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하기에!

그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한채로 2천년을 내려온 것이다.

그 결과가 현 기독교의 모습인 것이다.

그것을 또 대단하다고 신학교를 세우고 유전으로 자랑스럽게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첫 단추가 어긋난 것이다.

무릇 무엇을 배우기 전에 온전함을 갖추어가는 것이 우선되어야하는  법이다.

이젠 온전해질 때이다.
온전해진 사람의 눈엔 온전함이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