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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앞선다는 것!


사람과 사람이 갈등을 겪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마음이 상대의 마음보다 앞서갈때다. 나는 아렇게 저렇게 배려를 해서 최선의 결론을 낼수 있다.
헌데 상대는 내 배려를 이해하지 못할수 있고, 또 그 배려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있지 못할 때가 많다.

좀더 깊이 논하자면 사람의 마음은 차원체다.
시공간이 각자의 차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나는 4차원으로 다가설때 3차원의 사람은 소통되지 못하고, 내가 3차원으로 다가설때 상대는 2차원에 있기에 역시 소통이 되지 못한다.

결국 배려한 사람은 앞서가는 사람이 되고 결론적으로 상대를 배려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묘한 구석이 있다. 각자 개성이 강해서 보편적 사실이나 상식을 주장할 지라도 마음에서 틀어지면 삐딱선을 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여러 객관적 사실이 있음에도 오리발을 내밀며 모르쇠로 일관한다.

유대제사장들을 보더라도 상당히 상식과 지식에 차원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였다.

헌데 예수님이란 차원성의 존재가 출현 했을때 그들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예수님도 아마 아셨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이미 삐딱선을 탔음을!

예수님의 생각이 이미 그들을 앞질러가고 있음도!

헌데 중요한 점은 역사 자체가 강권적이라는데 있었다.

구약이라는 시대의 마음을 신약이라는 시대의 마음이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시대가 악하다고 한탄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7장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장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갈라디아서 1장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요한복음 17장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마음에 치우친 사람은 계속 마음으로 치우치고, 생각에 치우친 사람은 계속 생각으로 치우친다.

예수님의 사상은 하나님의 생각이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란 성령으로 사람의 마음에 깨달아지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이 성령으로 깨달아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구시대 제사장들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였다.

생각과 마음은 다르고 그 쓰임새가 다르다.
마음이란 육신을 지닌 피조영에게 존재하는 차원체다.
그래서 인간은 마음존재체라 불리운다.

영인 신은 생각존재체다 하여 성자는 생각의 존재체라 샘께서 칭하신 것이다.

하여!  처세란 무엇인가? 내 생각이 그들의 생각을 앞서갈때  내 마음도 이미 그들의 인식인 마음상태를 앞서가고 있는 것이다.

처세란 사대의 마음상태, 마음차원을 파악하는 행위다.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무엇일까? 상대와 내가 같은 차원에 머물러야 하는데 상대가 앞질러가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뒷차가 나를 빠르게 앞질러가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다. 저거 머지?

헌데 뒤따라오는 차량이 내 옆에 와서 깜빡거리면서 잠시 시선을 맞추고 내가 이해하고 브레이크를 살짝 밟아줄때 추월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이러하다.
상대가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처세다.

차원이 다른데 거기다가 여러가지 객관적 사실관계를 들이대면서 자기의 책임없음을 주장할지라도 상대는 이미 기분이 나쁜 것이다.

사람의 고뇌는 바로 여기에 있다.
메시아가 세상을 구하러 와서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려했으나! 냉랭한 마음에 불이 붙을리가 없다

낮은 곳으로 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낮은곳에 처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늘의 고뇌이고 역사의 고뇌이다.

샘께서도 내가 언제까지 너희들 똥기저귀를 갈아주고 있어야 하느냐?  반문하시곤 했다. 최근에도!

차원을 올린다. 과연 막연한 것일까?

추월하는 차량이 기분나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추월할 정도로 빨리 가야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리고 그의 생각이 무엇일지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말씀의 차원이 그러하다. 생각의 속도가 그러하다.

이러한 세계를 영이라 부르고 영계차원이라 부르는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어떠한 영주관권에 살다가 가느냐에 따라서 사후 삼위와 소통할 수있는 영계차원이 이미 결정되는 것이다.

거기에 신급이 어떠했고, 전도의 공적이 어떠했으며, 관리의 공적이 어떠했음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

그보단 영과 영계의 차원이 어떠했는지가 본질적이다.
육신을 벗어난 영들의 세계가 그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