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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우선순위

1.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2. 그와같이 네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라!

예수께선 인간이 사랑이라는 행위를 함에 있에서 우선두는 순위를 정하셨으니

첫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사람이 보이는 사람을 먼저는 사랑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수월하기도 하며, 피드백이 되기때문에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쉽게 말하면 대화가 되기때문에 사랑하기도 쉽고 소통하기도 쉬운 것이다.

헌데, 보이지 않는 신을 인간이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일까?

그 사랑이 에로스적 사랑이 아니라는 비단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로고스적 사랑! 말씀의 사랑! 진리의 사랑이다.

헌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로고스적인 사랑이 시작되고 어느 차원에 이르렀을 때엔
인간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그 뜻을 이해시키며 바라보는 이에게 사랑의 행위를 지혜로 깨우쳐 주신다.

아담과 하와가 가야했던, 전아담이 이루지 못했던 사랑의 비밀이다.

사랑은 크게3가지로 분류해 볼수 있는데
이것은 당연히 인식행위에 따른 분류이다

먼저는 로고스적 사랑이다.
인간이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랑으로 근원된 진리를 깨닫기 위한 행위이다.

다음은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둔 사랑이다.
슈바이처 박사와 마더테레사 수녀의 인류를 향한 사랑은 모두 이 아가페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은 인간의 정과 정에 얽매인 에로스적인 사랑이다.
에로스적인 사랑안에는 육체적. 정신적 사랑 모두를 포함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사랑도 그리고 어르적부터  배우신 사랑도 모두 로고스적인 사랑과 아가페적인 사랑인 것이다.

성경의 구절은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물어보면 나름의 개성대로 답이 오는 부분이다.

개역개정 누가복음 2장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어린 예수께선 먼저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로고스적인 사랑세계에 발을 디디신다.

그리고 묻기도 하셨다는 것은 아가페적인 사랑에 대한 것이다.

성직자가 행할 사랑이 무엇인지? 그들의 인식이 무엇인지?
이러한 것들이 바로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전아담이 이 아가페적인 사랑에 실패했기에
사명자로서 탈락된 것이다.

메시아의 길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메시아는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몸소 실천하면서 깨닫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기반위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류를 사랑해가는데 이것이 바로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하면서 또는 성직자로서 행위를 하면서!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고있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셔서 하신 행동이 무엇이었고, 그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무엇때문에 예수께선 예루살렘 성전의 행태를 보면서 심판하셨는가?

개역개정 마태복음 21장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을 깨우치지 못하고선 아가페적인 사랑도 불가능하단 점이다.

성직자들이 왜 그리 곤고해하는 것일까?

중세시대의 교회 지하무덤엔 신생아의 시체가 그리도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아가페적인 사랑과 에로스적인 사랑의 경계선에서 맴돌고 힘들어하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까지도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생각의 차원이 올라가야 가능한 것이다.

기독교가 퍼진 나라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하면서도 그들이 행하여온 일들이라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수 없다.

식민지전쟁을 하고 그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타락의 길을 걸어왔다.

영화 미션을 보면 선교를 핑계로 일단 들이대고,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이유로서 총칼로 학살을 하고, 그다음엔 경제적인 수탈을 해왔다.

이러한 행위들 속엔 나름의 뜻이라면 뜻이 있을수도 있다.

남미쪽 국가들은 혼혈이 많은데, 아버지가 모두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군대의 우두머리가 퍼트린 씨앗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원시인의 토템신앙에서 기독교 신앙인 신약권으로 오게된 것이다.

하여튼!
예수께선 그 사랑의 우선순위를 두시고 그렇게 행하라 하셨건만!

제자들이 왜 그렇게 우선순위를 두어야만 하는지는 당연히 받아들이고 암송해왔다.

예수의 사랑은 신적 차원의 사랑이셨다.
그분만 할수 있는 사랑이 아닌!

내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랑이어야만 했다.

예수께서 행하신 아가페적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그 근본이 어디에서 기인하여 왔는지를 살폈어야했다.

달을 바라보지 못하고, 손가락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이러한 답보상태에 처해있다.

그 누가 나타나서 이렇게 행해야 한다고 이끌어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도 메시아가 나타나야 신약역사의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차원의 역사가 펼쳐져 가는 것이다.

헌데 예수께선 육신으로 절대 다신 오지 못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늘구름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불병거를 타고서 엘리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안타까움이 이 신약역사에도 여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