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가 누구의 진전을 이어받았다고 표현을 한다.
이는 어떤 가르침이나 깨우침이 누구에서 누구에게로 이어졌다고 할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철학 사조에서도 시대를 뛰어넘어서 그 진전이 이어진 경우도 있다.
당연히 전대의 인물과 후대의 인물이 동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기에 그들 둘 사이엔 어떠한 교류나 대면이 있을 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그러한 표현이 있는데, 좀 다르게 적고있다.
개역한글 요한복음 14장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또한 엘리야가 온다고 했던 말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될것이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시기를 학수고대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근엄하신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였을까?
하나님이 어떠한 생각을 하시고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말씀을 하실지가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이지!
세마포 찬란한 황금빛의 옷자락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영계에 경험을 간증하는 사람들을 보면 천사가 어떠한 옷을 입고, 예수님의 세마포가 어떠하고 등등 이러한 말들을 하는 것이다.
정말 생각이 없는 표현들이다.
제대로 된 생각의 세계를 이룬 사람들은 그 옷의 모양을 통해서 느껴지는 그 심정의 느낌들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심정의 어떠한 언어표현인지를 논해야만 하는 것이다.
영계에서 차원급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세상의 이치를 보면 유사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재미있게 놀수 있을지를 궁리할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라면 하루 동안 해야할 일과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수들에 대해서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면서 보낼 것이다.
영들도 마찬가지다.
차원성이 있는 영이란 바로 그 생각의 세계에서 갈라지는 것이다.
영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차원이 바로 그 영들의 차원급인 것이다.
그러면 그 영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갈 수 있을까?
바로 행위에서다 실천에서다.
천국에서의 실천이란 바로 금은보화와 같은 것이다.
왜 그럴까?
지상에서도 금.은 보화는 아무나 얻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한다.
그처럼! 천국에서는 실천/행위란 아무 영이나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에너지의 세계다. 그런데 지상처럼 힘들게 노동을 통해 재화를 얻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러한 노력이 요구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실천의 환경이 전무하다는 뜻과 같다.
그래서 천국에선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무언가 사명을 주고 일을 시키면 그것이 그리도 큰 것이다.
반면 자유의지의 인간이란 자체적으로 창의적 생각을 하고 그 생각대로 실천함으로써 상대에게 기쁨, 슬픔, 감동, 환희 등등의 생각에너지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사에겐 자유의지가 없다.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마치! 로봇과 같이 시킨 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답답하여 하나님께선 그 분의 심정과 생각을 차원적으로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상대체인 인간을 창조목적 하신 것이다.
창조의 완성은 휴거이고,
휴거의 완성은 생각의 차원을 높여가는 것이다.
예수께선 심득을 얻어가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기 위해서 생각하시고 , 깨닫고 실천하신 것이다.
카테고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