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세월
구약!
구약이란 단어를 들으면 우리의 인식속에 어떠한 느낌들이 떠오르는가?
고난!
고난이라는 단어가 역경이란 말과는 또 다르게 다가온다
고난! 이 희망이 없는 단어가 주는 그 황량함과 쓸쓸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역경이란 단어는 적극적이고, 의지적이며, 능동적인 상황을 드러내고 있지만!
고난! 이 고난이란 단어속에는 희망보다는 좌절, 의지보다는 강요의 이미지가 강하게 다가온다.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엄히 말씀하시기를!
너는 정녕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아라!
하지만, 아담은 하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만이야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지속적으로 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선 그 반복된 행태를 보시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너는 짐승의 그러한 삶으로 살아가려무나!
인간의 삶을 살지 못하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희망도 사랑의 의지도 두지 아니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약이란 세월을 4천년을 두고서 후아담이 오기까지 그 고난의 세월을 같이 감내하신 것이다.
인간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하시었건만!
짐승의 그러한 모양과 형상으로 살아가는 인류에게 하나님의 그 심정의 쓰라림을 어찌 표현 할수 있을 것인가?
구원이란 단어는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하나님에게도 구원인 것이다.
전능자 하나님을 그 깊은 아픔속에서 벗어나게 해줄 자가 누가 있을까?
예수께선 아버지의 그 마음을 헤아리시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역사를 펴시겠다고 사명을 선포하신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 진리요!/ 생명이라!
이러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따라서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이끌어 갈 것이다.
몽학선생이라 칭한 유대의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은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으셨던 것이다.
시대마다 세워진 사명자들은 그러한 심정의 핵/ 생각의 핵을 깨우치고 하나님께 사람들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 시대 포스트 지저스시대다.
이미 신약 역사권도 2천년이 다 지났다.
누가 있어서 이 시대 심정의 핵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갈 것인가?
하나님은 후아담 예수님처럼!
누구를 보내시고 이 심정세계의 섭리를 펴 나갈 것인가?
메시아가 오면 좋고 그게 안되니 선지자를 세우셨으며, 그 마저도 허용치 않는 상황에선 사사를 세우시고 역사를 펴오셨다.
이쯤되면 누군가는 항상 오는 것이고, 그 사명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하여! 하늘을 바라보기 보다는 이 땅에서 어떠한 말씀들이 선포되어가 가는 가를 지켜보는 것이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태도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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