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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안다는 것- 관조

내 자신에 대하여 알아간다는 것은 인류가 철학이란 세계를 열어갈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화두로 자리잡았다.

너는 누구냐?
저게 머지?
정확하게 모르겠네!
내가 아는게 머지?
이런 인식행위를 거듭하다보니!

어느 때에는 알겠고, 어느 때에는 모르겠는지라!

알고 모르고, 깨닫고 막히고, 나아가고 멈추고!

이런 방식의 행위들은 결국 인식행위의 주체인 자신을 향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뒤돌아보고 내 생각의 행위가 과연 어느 합당한 기준으로 작용하는지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하여! 학문이나 인식행위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접근하고 다가서는 하나의 행위가 드러났으니!
이를 관조라 칭하였다.

모든것은 시작점이 존재한다.
그 인식의 시작점을 찾아가는 것이 관조행위다.

나는 누구인가?
이 해답은 내가 어디서 출발하여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왜일까?

배엔 선장이 있어서 방향을 결정하고 나아가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의 인식행위도 어떠한 생각에서 줄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시작인 생각의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 관조다.

아하! 저런 생각의 뿌리에서 나라는 존재가 시작되어서 나아가는 것이구나!

그러하다보니!

결과가 선하거나 악하거나!
둘중 하나를 선택하고 본다면 그 행위의 인식주체인 인간이란 본래부터 선하거나 악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학자들이 주장하는 성선설 내지 성악설이다.

그렇다면 그 생각들은 자생적인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파장의 영향으로 인한것인지?

결국 나를 안다는 것은 나라는 생각존재가 어떠한 메카니즘으로 작용해 가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관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학문을 탐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학문의 전부라 할수 있다.

사람이 배워가는 것은 결국 인식행위인데 그 주체가 어떻게 반응해가는지 깨달아가는 과정이 학문인 것이다.

누구는 가르치고, 누구는 배운다.

예수께선 말씀하시길!

내게 배워라! 그리고 너희는 세상에 나아가 선생의 선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라!

결국 인생의 선생은 근본을 가르치고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란 근본된 가르침을 주는 인생의 스승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인생에 대하여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식행위의 반석, 주춧돌이 되는 것이다.

그가 없이는 모든 인식하는 행위들이 결국 무너나게 되는 것이라!

근본을 모르기 때문이고 시작을 모르기 때문에 종국엔 방황하기 때문이며, 목적지 또한 모르기 때문이다.

가정을 시작했다. 헌데 가정이 깨어져 나간다.
가정을 시작하게된 근본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다. 남녀가 사랑해서 만나서 가정을 꾸린 것인데
자녀에게 더 사랑을 쏟고, 물질에 더 관심을 가지고, 명예를 더 추구하고, 자신을 꾸미는 것에 더 열심을 내다보니 어느 순간엔 사랑이 저 멀리로 떠나가 있더란 것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살피면서 나의 반응을 지켜보야 알수 있는 것이다.

나를 살펴야한다 나를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 사고를 피할수 있다.
유불리의 판단을 쫒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막다른 곳에 다다르고 있을 것이다.

회개란 생각에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올바르게 살피며 사랑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예수께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유대인들에게 사랑하라! 말씀하셨을까?

유대제사장들중 정말 율법에 열심이고 나름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일까?

왜? 그들의 인식과 시대사명자와 인식의 충돌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랑하는 방식의 차이 사랑이란 인식의 차이에서 십자가 역사와 고난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시대가 악해서 이미 신약역사는 기울어져서 갔던 것이다.

그 기울어졌던 신약역사는 언제 바로 잡아지는 것일까?
새시대가 와야하고 새시대 말씀이 선포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를 휴거역사라 부르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야한다.
그것을 베드로가 못했다.
사도 바울도 하지 못했다.

베드로는 자질이 부족하였고, 바울은 때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