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내게로 와서 배우라!
이렇게 말씀하심은 무엇때문이었는가?
모든 성인들이 그러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고 이치를 모르기에 힘들게만 살다가 끝나는 구나!
바로 이런 측은지심, 안타까움, 자비, 사랑 등등을 떠올리며 같은 사람으로서 가르쳐주고 깨우쳐주어서 세상이 평화롭게 유주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께선 너무도 어린 나이에 성전에 들어서 제사장들과 대화도 나누고 의문을 품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았던 것이다.
단지 신동이라는 말로는 표현할수 없는 사명적 접근이 있었던 터이다.
몽학선생이란 표현을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단지 꿈이나 풀어주는 그러한 차원에선 인생의 근본과 창조의 근본을 깨우쳐 줄수 없었기에!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여 갈등의 고리를 만들어갈 때에 예수께선 오셨다.
로마라는 강력한 세계적 패권에 억압받고 있었고, 기존의 유대신앙은 율법이란 뼈대만 유지한채 영적갈급함에 허덕이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한 때에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하였고, 힘들어하던 유대인들은 곤고함속에서 그리스도가 이제나/저제나 오실까?
학수고대하였던 것이다.
정작!
그들은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무엇을 가르치시고 깨우쳐 주실것이란 기대가 있었을까?
단지 민족의 상황이 이러하니! 한시도 바삐 육적 상황들을 도깨비 방망이 하나로서 해결해 주리란 믿음과 기대가 컸던 것이다.
그러하니!
혹 세례요한처럼! 신앙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사람들을 카리스마있게 뭉쳐서 로마에 대항이라도 하였으면 어떨까? 그런기대라도...
하지만!
예수님의 사상은 그들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가이사의 것인 가이사에게 주어라!
물론 그들의 시험을 피해가심도 있으려니와!
예수께선 물질에 대하여 이야기하심이 아니라!
바로 영혼에 대하여 말씀하고 깨우쳐 주시고자 함이였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놓고서 떡이라고만 믿는 제자들도 있었다.
현장에 없었기에 그런 오해도 있었거니와!
근본은 따르던 12사도들의 영적수준이 그랬던 것이다.
걸인처럼 문전걸식하고 노숙을 밥먹듯이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속에서 무엇인가 희망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가룟 유다 그는 왜 변절했을까?
예수님과는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다.
예수님도 당연의 그 성향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일 팔아넘기는 그 순간까지도 돌이키토록 애쓰셨다.
지금 기독교가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무엇을 위함인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되 기억일 뿐이다.
정말로 아직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면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보고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성경을 보면 나온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논쟁을 보면 영도 천사도 있다. 아니라!
아니! 도대체 영과 천사와 천국에 대한 실존까지도 의심하는 자들이 그시대 제사장들이라고 하였으니!
말그대로 몽학선생일 뿐이었다.
다시오실 그리스도라면 분명코 물질에 치우쳐 창조본연의 인간성을 말살해가는 이 시대에 대하여 말씀하실 것이고!
창조된 인간본연의 가치인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그 사랑안에서 지상에서 사는 동안 형제를 사랑해가는 올바른 방향과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실 것이다.
신약성경엔 예수님의 구체적인 방법들이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다.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주란 말씀이 있는데..
그러한 사랑이란 궁극의 목적이 무엇이였는지에 대한 디테일이 없는데 이는 차원성이 너무 부족한 그 시대엔 다 풀어놓으시기 어려운 환경이였을 것이다.
이 세대를 바라보면 분명 명확하게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연장자에 대한 예우도 사라지고, 교권의 침해상황을 보아도 그러하고!
그냥 Do it yourself ! 다
니 맘대로 살아가세요다. 최소한의 구속안에서 니 인생 방탕하게 살다가세요!
이게 이시대의 철학이 되어버렸다.
바로 그러한 시대에 예수께서 오신것이다.
유대신앙의 기본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성전은 장사치들이 판치는 강도의 굴혈이 되버렸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만 보더라도 동방예의지국!
이러한 과거의 역사는 희미해졌고!
참 스승이 없고! 참 지도자가 없는 세대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까?
예수님이 오지 않으시면 누군가를 시켜서라도 마치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통한 역사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사람의 문제를 사람에게 물어서 해결될 수 는 없는 것이다.
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주께 묻는 것이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저는 어디로 가야하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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