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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속도와 영계의 파장

빛의 속도를 체감하려면 어떠한 방법이 있을까?

지구라는 거대한 천체덩어리를 1초라는 시간에 7바퀴넘게 돌수 있는 속도이다.

30만키로/sec

헌데 우주는 매순간 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개미가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가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어찌어찌 남해안까지 기어서 갔다고 치면 거기서 바다를 어떻게 건널수 있을까?

또 기어간다고 하면 어느세월에 남해안까지 갈수 있을터인가?

서울시내를 벗어나려해도 일생을 다바쳐서 기어도 힘들터이다.

그래서 감히 생각조차도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달탐사선을 타고서 우주로 나갔다는 것은 개미가 배를타고서 제주도에 갔다는 말과도 같다.

개미로서는 신대륙을 최초로 탐험한 콜럼버스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탐험욕구가 발동해서 인간 인식의 한계를 극복해왔다.

태양계가 다인줄로만 알았던 우주가 천문관측의 노력과 연구로 은하계가 더 있다는 사실도 알았으며, 나아가 은하내에 성운인줄만 알았던 것이 또 다른 은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밝혀내고 받아들이기까지 우리의 시간은 도전과 극복의 시간들이였다.

세대간의 갈등, 제르레이션갭이 존재한다
왜일까? 바로 인식의 충돌이다.

라떼라는 말이 유행인데...
꼰대문화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사람은 인식의 존재로서 내가 존재하는데 그에 기반한 인식이 있고, 상대도 그가 존재해온 인식의 기반이 있기에 서로가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세대가 같고, 지역이 같고, 학교가 같고, 삶의 수준이 같았다면 어쩌면... 인식관이 비슷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문명의 혜택권에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인식관이 극명하다.

구약의 문명권에선 짐승의 사체를 놓고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신약의 문명권에선 물질을 벗어나서 신에게 마음/정신/생각의 내면세계로 나아가는 것이고, 예수께서 그리하라고 가르치셨다.

가인이 곡식으로 제단을 드렸더니 받지 아니하셨다
아벨은 짐승을 드렸더니 흠양하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짐승으로 제단을 드리는 것일까?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구약의 인식인 것이다.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사람의 마음을 내세우고 가르치시고 그를 통한 하나님과의 영적교통으로 이끄신 것이 신약이다.

인식의 차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오늘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예수께서 그토록 자신있게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믿으면 다 아시고 다 해결해 주신다 말씀하셨다.

기독교 신약의 문명권에선 더이상 굶주림에 시달리지는 않게 되었다.

최소한 그러한 기반위에서 사람의 내면세계를 논할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과학을 하고 철학을 하는 것은 삶의 고통에서 어느정도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부터다.

생각의 속도가 비로소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필자의 부모세대는 생각할 겨를없이 먹고 살기에 바빳다.

6.25피난을 경험한 세대이고 그 세월을 힘들게 살아왔다.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했던 것이다.

철학을 논하고 신앙을 접하기엔 너무도 힘든 시기였던 것이다.

이젠 대한민국도 먹고 살만해졌다.
그래서일까?
다양한 생각의 스펙트럼들이 사회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유독 정치분야엔 빨강과 파랑의 음과 양이란 원색만이 존재하고 행위도 원색적이다

정치인들도 말로만 학력이 어떻고, 신앙이 어떻고 떠벌리지 말고...

내 삶의 철학이 어디에 기반해서 경제철학도 어떠하다고 주장을 하던지..

내 삶속 신앙은 이러한 기반위에서 사회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법집행이란 것에 대한 내 인식은 이렇다 그래서 이러 이러한 방향의 행정시스템을 구축해가겠다 표현할수 있어야한다.

모 시장께선 어릴적  돈때문에 어머니가 시장통에서 머리채를 잡히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응당 국립의료원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있어야함에도...
말과 행실이 다른 것이다.
철학이 없는 행태다.

내 삶을 내 가족을 내가 속한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한다

예수께선 사랑이란 화두를 던지셨다.
너희가 사랑을 아느냐?
베드로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이란 화두를 베드로는 죽을때까지 깨달으려고 한맺히게 살았다.

사도 바울도 살아생전에 그리스도를 핍박만하고 십자가로 내몰았다.
그런그가 예수님을 사랑함에 육신으로 못한 한을 영적사랑으로 승화시켰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도 예수님의 그 사랑을 내가 깨닫고 가는 것인가?
그 화두 하나를 품고 갔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세번이나 부인하며 제육신 한몸을
건사했던 그 기억이 가슴속 깊은 화인이 되어 순교의 순간까지 남았을 것이다.

생각의 속도는 물질의 한계인식을 벗어나야 발동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우주를 생각하면 우주가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이 영의 세계를 생각하면 영의 세계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세상의 언어인 문자로 표현 되었기에 자구에만 얽매이고 그대로 바라보면 그냥 물질세계의 인식대로만 받아들이게 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떡 5개 물고기 2마리의 이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다.

떡에 관한 것이 아님을 모르느냐? 책망하셨다.

생각의 속도가 생각의 차원이 바뀌어야 영의 세계가 보이고 인식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저 끝없는 우주가 존재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우주의 끝엔 무엇이 있을 것이며, 그 우주의 끝을 탐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바로 과학과 종교가 만나는 지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