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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만 어리다고

스포츠를 행위의 예술이라고 표현한다.
더 확장시켜보면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은 예술이다.

예술: 미적(美的) 작품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 활동.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란 아름다움을 의미하기도 한차원 들어가서 심미를 뜻하기도 한다.

심미안을 지닌 사람은 아름다음에 대해 디테일하게 논할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대학교시절 밤10시에 중앙도서관에 공부하고 있는 어느 여학생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잊혀지지 않고 있다.

백색의 형광등불 아래에 기다란 도서관 책상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학업에 열성을 다하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이처럼 살아움직이는 모습에서 어떠한 아름다움을 볼수 있다면 그것이 심미안이 아닐까?

스포츠는 어찌보면 예술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유연한 움직임을 보면서 그리고 짜맞추어서 호흡을 이루어 단체경기를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농구의 신 마이클조던의 화려한 에어무빙을 보노라면 Beautiful! 이라는 찬사가 튀어나오곤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그 행위속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지면 그 나이에 상관없이 그 미모에 상관없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매료되는 것이기도 하는지라!

예수님을 따르던 12사도들 또한 예수라는 그 인간적 매력에 매료되어서 따랐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언급도 하지만!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를 못했지만!
왠지 그 사람에게 매료되어서 신뢰하고 따랐던 것이다.

아마 예수님의 행위를 지켜보면서  제자들도 심미안을 키워갔을 것이다.

아름다움! 그리고 진리!

진리라는 것의 속성이 미/추를 구별하고 추구하게 이끄는 힘이 있다.

하여 사람의 행위를 보면서 아름답지 않은 행동과 아름다운 행동을 분별하여 행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선 심판자로 오신 것이지만!

죄를 언급치 않으시고 사랑을 논하셨다.
그리고 그 행위가 온전함과 온전치 못함으로 구분하셨다.

온전한자들이 몇이나 될까?

앉은뱅이 귀머거리 벙어리 문둥병 등등에 이르 기까지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기도하셔서 치유해주셨다.

선한것과 온전한 것에 대하여 말씀해주시고 너희도 그렇게 거듭나라 가르치신 것이다.

간음한 여인에게 죄없는 자만 돌로치라! 말씀하셨으니!
사람들이 스스로 물러들갔다.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실때 악하게 창조하시지 않았음을 아시기에 되돌리려, 회복시키려 화목제로 오신 사명을 행하신 것이다.

대학교 1학년때 그 중앙도서관에서 그 느낌은 온전한 학생의 행위를 보고서 다가왔던 것이다.

캠퍼스의 낭만을 논하면서 놀기 바빴던 시기에 가장 학생다운 진리탐구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저럼! 우리가 일상의 생활속에서 아름다움을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온전함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서지 못한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교통경찰관을 보더라도 딱지만 끊으려는 분도 있겠지만!
계도하고 이끌어주고 타이르는 분들도 계신다
아마도 법의 칼자루가 아닌 사람의 선한 마음에 호소하는 행위일 것이다.

예수님의 설교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는 말씀인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를 못한 사람은 천국의 문인 마음에 화인을 맞은 사람일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경험도 많이하고 그 과정에서 많이 겪으면서 상처도 분노도 혈기도 그리고 슬픔과 서글픔도 사랑도 연민도 느끼는 것이라!

그 결과로 사람의 인식관이 형성되어간다.

그럼에도 심미안을 지닌 사람들은 온전한 행위를 찾아서 살아가려 노력하는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자기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서 아름다움의 본체를 깨닫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

심미안은 바로 진리의 눈이라 할 것이다.

지금의 세대는 선한가?/악한가?

진리의 눈을 바로 갖추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노력하고 투자해야할 시간들이 얼마나 주어지는 것일까?

세상이 갈수록 흉악하고 잔인한 범죄가 특히 어린나이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이 기사에 나오곤 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교육 입안과 정책진행자들이 어떠한 고민을 해보아야 할 것인가?

조선시대 예를 들어보자!

예술이라는 한자에서 ‘예(藝)’에는 본디 ‘심는다(種·樹)’는 뜻이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기능(機能)’ ‘기술(技術)’을 의미하며 고대 동양에서 사대부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였다.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서의 ‘예’는 인간적 결실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기초 교양의 씨를 뿌리고 인격의 꽃을 피우는 수단으로 여겼던 만큼 거기에는 인격도야의 의의도 있다.
- 네이버검색.

나이만 어리다고 스스로 커가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교육시켜야 온전하게 성장해 간다.

체육수업을 줄이고, 한자교육을 폐지하고, 도덕과 윤리에 대한 교육을 배제하고
고등학교에서 동아리활동 및 동아리실을 폐지하고...

실용성이란 인간생각의 한계가 불러온 이시대의 참사를 무엇으로 감당해가려 하는 것일까?

교육을 맡은 사람들의 수준과 차원이 실용성에만 머물러 있는 것일 터이다.

관료이기전에 교육자이어야함에도!
교육자의 틀을 벗어던지고 관료로서의 성장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나 있을까?
교육하면 카이스트에 천재들을 모아서 과학강국을 이루는 것이 전부일까?

대한민국의 수많은 문제들 심각한 문제들은 윤리와 도덕과 양심의 결여에서 거의 다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교육을 맡고 있는 자들은 과연 이 책임을 통감하고 있을까?

한 나라를 무너트리려면 윤리와 도덕을 무너트리면 간단하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양심이 물들어가면 그 나라는 곧 무너지게 되어있다.

종교란 바로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
종교가 무너지고 있기에 ...
대한민국에 이런 모습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참 교육인 참 종교인이 필요한 때이다.
예수께서도 선생이란 호칭으로 많이 불리우셨다.
인생의 참 스승이었다.

예수께선 정말 진심으로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셨으니!
그 심중의 뜻을 제자들이 어찌 깨달을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