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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란 진리의 실체

새벽이란 진실의 통로다.

낮과 밤이란 보여지는 세계의 일상들이다. 낮엔 할동하고 밤엔 잠든다.
하지만 낮에도 밤에도 잠들어있기도 한다.
낮엔 밤이 잘들고 밤엔 낮이 잠들게 된다.
사람은 의식의 존재로서 밤에도 인식하고 낮에도 인식한다.

음과 양처럼 어느 하나에서 하나로 흐르게 되어있다.

창조의 법칙은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라!

베드로도 밤을 맞도록 인생을 살아보았지만 얻은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인생에서 처절한 고뇌를 했던 사람이 베드로였다.
현실에선 볼수 없고 느낄수 없었던 세계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깨달을수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중 제일먼저 인생의 새벽을 보았던 사나이!

어느 하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식할수 있기위해서는 반대편에서 객관적으로 볼수 있어야한다.

안을 바라보기 위해선 밖에서 보아야하고 밖을 제대로 보기위해선 안에서 보아야한다.

집도 그렇다! 밖에서 보이는 주변과 안에서 바라보는 주변을 다르다.
가리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에 가리고 상황에 가리고 생각에 가려서 인생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채 시간만 흐르는 경우가 많다.

부부가 그러하고, 형제가 그러하고, 자녀가 그러하다.

가치를 알아간다는 것도 그러하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제대로 깨달아가기 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의 삶, 주관이라는 가리는 장애물이 허물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새벽은 그러한 가리는 것들을 무너트리는 시간이다.
내가 네가되고, 네가 내가되어서 나를 바라볼수 있는 관조의 시간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현재를 통해서 과거를 꿰뚫어 볼수 있어야한다.
이를 무한반복의 시선으로 인식할때 진리의 통로가 개척이 되는 것이다.

성경역사도 동시성적으로 진행이 되는 이유다.

진리란 인식의 실체다. 인식행위를 통하여 완성이 되어가는 것이다.

구약의 율버보 십계명이라는 계명을 모세가 받았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으로 깨트려버리고 다시 받아온 것이 아닌가?

시간의 창조주 하나님께선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진리의 역사를 완성시켜 나가고 계신다.


시공간이란 물리적 개념도 인간이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등등 하나님도 인간의 인식을 기반으로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시고 역사해 오신뜻이다.

새벽을 완성시켜 나가는것 인식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이러한 제대로 된 인간의 마음, 인간의 이성을 추구하시는 것이다.

천사들로 이루어진 비조영들의 세계는 순간 이루어지는 일체된 생각의 디지털의 세계다.

디지털이란 1과 0이다. 있다 없다의 개념이다. 이진법적 사고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는 단순이 있다/ 없다는 2분법적 사고로만 바라볼수 없는 세계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존재하는 그런 세계다.

그것이 바로 실존의 세계다. 실감해가는 세계인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 있지만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에 대한 인식이 생겨가면서 사랑이 싹트이면 그땐 없던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러한 내면세계를 통찰하신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기대하시고 바라보시려던 창조의 목적인 것이다.

실존의 세계 / 실감의 세계를 창조하시려던 뜻이었다.

샘의 사랑도 다르지 아니하다. 이러한 실감의 세계를 쪼개어 분석하며 세워가시는 것이다.

천국황금성란 인간노력의 결정체다. 인식하고 인식하여 순수 본질을 캐내어가는 것이다.

주는 보는대로 듣는대로 판단하고 심판치 아니하신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인식의 전환을 매순간 거듭하는 사람들은 영혼의 변화가 극대화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자계실때가 기회였던 이유가 있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창조의 시간이였다.
내 마음속에서 천지창조를 수없이 하시던 시기였다.

그래서 매순간이 새벽이되어서 정신의 천지개벽을 맞이하였다.
매순간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볼수 있었던 시기였다.

성자역사와 성령의 역사가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닌 비추어서 바라보는 것이라면 성자의 역사는 내가 직접 겪으면서 깨달아가는 것이다.

지금은 성령의 역사라 하지않는가?

성령의 역사는 단순히 성령님의 역사라고만 인식해선 단순하게만 깨닫게 된다.

성령은 정결의 신이고 깨끗함의 신이다. 그럴수 밖에 없다

내가 직접  내마음이 직접 경험하면 진흙탕 구덩이를 헤집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도 깨달음 열반(해탈)을 진흙탕속 한송이 연꽃으로 비유했다.
몸으로 생생히 느껴지는 감각의 실체를 인식해가며 깨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란 그것이 아니라! 주와 일체되어서 그 깨달음을 간접척 체험을 하는 것이다.

실감적 측면에선 조금 무디어지는 것이나, 객관적 측면에서 더욱 세밀해지는 것이다.

성자의 휴거역사는 진흙탕처럼 직접 온몸으로 경험하며 깨달아가는 것이라 실감이 더욱 강렬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자 3.16 떠나신 후 샘도 /계시자들도 그리 허전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실존의 세계가 마음에서 정신의 세계로 옮겨가는 이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