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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굽어보다

인류의 시작과 지구촌 이끝에저 저끝까지를 아우러 바라보노라면...

문득 이렇게 바라보게 되는 시각이 낯설게 다가온다.

미국의 힙한 도심으로부터 인도네시아의 어느 신석기 인류가 살고있다는 섬에 이르기까지..

각자 그들의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만의 생각과 시각으로 인식하여보니!

나와 똑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혼자인 것이다.

그러하니! 나는 오직 홀론 존재할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는 만큼 살아가고 모르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안다는 것과 모른 다는 것의 궁극은 인식에 있다

내가 지식이 있어도 인식하지 못하면 무용하고
내게 지식이 없어도 인식하게 되면 노력하고 결국 알아낼 수가 있기에...

하지만!
사람은 늘 일상속에서 무지를 경험하고 살아간다
내가 원하던 원치않던간에 나는 무지하고 인식의 불능속에서 해매일 뿐이다.

그러다보면 바로 옆에 두고서도 몇십년 세월을 허송하고 지나간후엔 미쳐 인식하지 못했던 세월에 대한 진한 후회와 회한만이 쓸쓸하게 맴돌뿐이다.

역사란 그러하다.
항상 인식하지 못함으로 자기 스스로를 가두고 그 한계상황에 고통을 받으며 지나온 것이다.

또 주변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온갖 어둠의 사슬을 가지고 옴싹달싹 못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기도!

항상 이러한 문제들의 근본은  보이는 물질들의 세계속에서 더 얻기위한 자기들만의 욕심에 빠져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욕심들이 자신과 주변인에게 고통을 더하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바로 이런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스스로의 욕심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 가야할 길이다.

석가모니의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소크라테스의 배고픈 인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보여지는 세계의 것들에 대한 욕심과 보여지지 못하는 세계의 것들에 대한 인식에 관하여 논하고자 함이다.

사람은 무엇때문에 행복하고, 무엇때문에 불행한가?

기본적으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불행할 것이다.

또는 어떤 근심이 있는 사람은 불행할 것이다.

또 어떤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도 불행할 것이다.

사랑을 얻지 못한채 살아가는 사람도 불행할 것이다.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도 불행할 것이다.

천하란 하늘과 땅이다.
이러한 천하를 담을수 있는  그릇이 있으니!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그릇으로서 담을수 있고,  문으로서 새로운 차원으로 통할수 있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그릇으로 인식하고,  도를 다루는 세계에선 문으로 인식한다

헌데 결국은 차원을 핵으로 본다면 다 같은 맥락이라 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단절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 한계안에서 고통받고 힘들어한다
그 한계가 자기의 목에 차기까지 버티다 더이상 참을수 없게 되면 그때엔 그 한계를 과감히 벗어나서 탈출하게 된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말씀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랑이란 세계는 인식이라고 하였다.
누구를 / 무엇을 사랑하는 던지..
그 핵엔 인식이란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식엔 생각이란 차원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한번에 근본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기에 매일 새롭게 인식해가지 못하면 그  차원에 있게된다.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기에 실증이 나면 그 사람을 떠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다른 부분을 인식하려고 노력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다.

인간은 근본을 꿰뚫어보지 못하기에 외식으로만 대하다가 끝내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근본을 꿰뚫어 보기에 영원히 사랑할 대상으로 선택하고 영원한 세계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의 영원한 세계로 가는 인간의 운명과 그렇지 못한 세계로 가는 영혼의 차이는 극명한 것이다.

지옥이란 무엇일까?

고통을 받고 형벌을 받고 그런 영원한 사망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다.

헌데 굳이 그런차원을 논하지 않더라도
지옥의 개념은 다양한다.

1년 365일 매일 돼지고기만을 먹으라고 한다면 어떠할까?

더 나아가서 앞으로 10년동안 돼지고기만을 먹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맛있다고 느낄까?
맛을 느낄수 있을까?

그냥 고역일 뿐이다 마지못해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각의 다양성과 차원을 논하고 계시다.

수백억의 천사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어떠한 맛을 느끼시며 존재해 오셨을까?

하여!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창조하자 하시고!

우리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하시자!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의 모양과 형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완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삼위일체는 유일신이다.

사람은 사람의 인식은 삼위일체를 추구하며 존재해간다.

존재인식의 기반이 삼위일체 시스템인 것이다.

어떠한 하나의 사건을 보면 과거가 있고, 현재를 거쳐서 미래의 어느 지점을 향해감을 인간은 체득해가는 것이다.

존재인식의 기반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까지 걸쳐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정엔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걸쳐서 그 세대간의 인식차이가 존재한다.

유물론적 인식에 기반한 정반합의 논리도 여기에 속한다.

우리의 미래란 무엇일까?

과거에 존재했던 것이 현재에 이르러 우리의 인식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인식의 충돌로 쉽사리 받아들이지를 못하게 된다.

하여 우리는 생각을 하고 고뇌하는 가운데 시대의 흐름을 읽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결단아래서 우리는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미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고 느낀다면 우린 현재에 처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이다

미래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상황인식이 될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이 없다면 미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려는 투쟁이 존재할 때에 명확한 미래가 다가오는 것이다.

신앙인들의 미래는 어떻게 오는 것인가?
그들의 미래는 과연 무엇인가?

주가/ 시대가/시대의 말씀이 그저 오는 것인가?

주도 시대도 시대의 말씀도 인식의 결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한 세대는 시대를 깨닫지 못했고, 주도 인식하지 못했고, 시대의 말씀도 깨닫지를 못했다

그러한 세대는 주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말씀도 부인하게 되었다

결국 그 세대와 그 세대의 사람들은 모두 사망으로 기울었다.

신앙인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