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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선한가/ 악한가!

사람이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그 근본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누구나 다들 이런 말을 하곤 하는데 다시 예수님이 오시면 그분을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례요한 처럼 멍청하게 자기 길만 가지 않을 것이다
맞다! 누구나 다 그런 생각들을 한다

주의 길을 예비하고자 지금도 철야기도를 하고 아직까지 오시지 못한 예수님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도 더러는 있다.

허면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지금까지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세례요한을 추종하던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 사후 400년을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것이다.

사람이 선하다면 선한이를 바로 알아보아야 했을 것이다.

헌데도 너무도 악한 민족성을 지닌 유대인들이라서 아직도 선한 존재자를 알아보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약인들은 그 민족성이 선해서 주가 다시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까?

2천년이 지나고 예수님은 다시 오시지 않으셨다.
우리는 선하니까!
당연히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못만난 것이다.

헌데 이런 믿음이 너무도 두려운 것이다.
이 믿음이 앞으로 100년이 더 지나고 200년이 더 지나서도 계속 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길은 마음에 있어서 마음에서 찾지 못하면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주도 자기 마음속에서 찾아야 보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처럼!

그래도 사도 바울은 행복했던 사나이다.
뒤늦게라도 죽기전 주를 자기 마음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신학서적을 탐독하고 여러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고, 수없이 기도를 하고 안타까안 마음에 기도를 해보았을 터이다.

주는 어디에 계십니까?
주는 어디로 행하십니까?

주는 하나님의 발길이 머물도록 이끄시는 존재자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동행하시는 존재자가 바로 주인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이 이것을 깨달았다.
제자들에게 말씀을 듣고보니 자기가 그렇게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던 예수의 말씀이었다.

그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그 말씀을 반박하고, 비웃기까지 했던 그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자!
그는 마음속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비통함에 자기 가슴을 뜯었다.

그 심정의 눈물을 흘리어본 사람만이 느낄수 있는 그 아픔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왜 그때는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했었을까?

내 안에 아버지가 아버지 안에 내가 있음을 깨달으라는 그 말씀을!

왜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을까?
이젠 십자가에 사라지신 예수님의 육을 그 손을 한번 잡지 못한다는 현실의 아픔과 고통속에서 그는 그렇게도 가슴에 돌 덩어리 하나를 품고 평생 주를 증거하다 순교하였다.

사마리아 여인도 거지 나사로도 알아보았고, 창녀도 주를 알아보았건만!

그렇게 거룩하고 온전하다고 자부하던 그 수많은 제사장들은 왜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를 못했을까?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 알게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실체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인간의 몸을 통해서 어린아이로 태어난 그리스도를 보고 돌아간 것이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마법적 권능을 행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닌!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상식과 법칙아래서 이루어 가신다.

그것을 그들은 체험하고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 사실임을 그렇게 이방에 알리신 뜻이다.

사도 바울은 제자들을 통해서 그가 왜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신지에 대하여 핵심 말씀을 듣게 된다

물론 그 제자들도 어설픈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성령은 그 말씀을 들을때 강한 감동으로 역사하셨다.

신약을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아들에 있다

아들을 어떤 차원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 구원과 구원의 차원이 각각 달랐던 것이다.

아들이란! 하나님이 종처럼 대하던 구약과 다르게 아들처럼 대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들로서 행할때 하나님도 아들로서 대해주시는 것이다

헌데 이 개념이 온전치 못한 전파로 인하여 사도 바울도 아들의 권세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왜일까? 살아서 육신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대하고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깨달아야 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여자를 한번도 보지 못한 남자는 이야기로만 여자를 배웠다

그런데 자기가 죽기전 제자에게 여자를 가르치고 죽었다.

그 스승을 통해 여자를 배운 제자는 여자에 대해 깨달으려 했지만 도체 깊이 알수가 없었다

그처럼!

신랑으로 온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핵심 사명인 아들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한은 바로 그것이다.

아들개념을 평생 깨우치려 했지만! 결국 문고리만 잡고 있다가 순교했다.

예수의 탄생만 축하할 일이 아니라!

이젠 그가 왜 아들인지를 깨닫는 크리스마스가 되이야 한다

2천년간 징그럽게 징글벨만 부를 것이 아니란 소리다.

스스로가 더 깊이 깨우쳐야 한다 아들이 무엇인지?
나를 따르고 믿는 이들에게 아들된 권세가 임한다는 뜻도 깨달아야 한다.

이 아들의 숙제를 풀어야 다음 차원의 신부차원에 도전도 가능한 것이다.

인생 얼마남지 않았는데 신약 차원에서 해매이다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가?

역사란 아이러니하다.
수많은 대제사장들도 있고!
뱃사람 베드로가 수제자가 되어 천국 열쇠를 받게 되었던 이 역사적 기록을!

하나님은 새벽 이 시간에도 스쳐가시는데 인생의 시간을 다들 어디에다 쓰는 것인지?

자기 마음에서 하나님도 주도 찾아야 한다.

사람의 육체는 짐승의 마음과 다르지 않으나
그 영혼이 있어서 사람으로 재탄생 시키는 것이다

어린아기가 태어나면 짐승과 다르지 않으나
영혼이 성장하면서 사람의 형상과 모양으로 재창조 되어가는 것이다.

결국 영혼의 각성이 되지 못하면 짐승의 그것으로 악하게 성장하고 악하게 행하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그러했다
신약인들도 그러한 것이다

영혼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자기 마음이 짐승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서 주를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재물의 신, 권력의 신, 명예의 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영혼의 마음이 아닌 짐승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무엇으로 느낄수 있는가?

그대는 선한가? 악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