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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생각의 차원

신을 믿는 종교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떠한 생각이 드는 것일까?

구시대 종교인들인 유대인들과 그 옆동네서 낙타타고 두건 쓰고 다니는 사람들

또 저 멀리 비슷하게 불리우는 소를 숭배하는 사람들

기독교와 카톨릭 정교회 사람들  ...

분명 사람들에겐 양심이 있고 그 양심을 토대로 자치규약과 종족의 문화 그리고 신앙의 기본 율례등등이 나타난다.

국가법은 논외로 치더라도 너무도 다양한 가치관과 규약 관습 문화들이 존재하고 나타난다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았기에 이리도 다양한 것일까?

도에서 색이라 표현하고 각양각색이란 말이 있다
생긴것도 하는 것도 제 멋대로이다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니까 크게 신경쓰지도 않는다.

바로 양심이다
양심이란 개인의 근본이고, 사회구성원들간 기준이고 기본을 이루는 근간이다.

양심업는 사람! 녀석들! 이렇게 평가도 한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헌데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은 기본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양심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양심은 행위의 기본과 기준이 되어서 사람의 행태를 좌우한다

거리낌림이 없는 것이다.

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은행 ATM을 이용시 운이 좋으면 되었다.
빈곳에 가서 서기만 하면 되었다.
최소한 양심인 새치기만 하지 않으면 양심있는 즉, 선량한 사람이었다.

헌데 소위 선진국이란 나라에 나가보니!
그렇게 했다간 다들 이상한 시선으로 보더라는 것이다.

그나라에선 이미 먼저 온 사람이 먼저 이용하는 것이 양심이라고 인정되어 그렇게 행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젠 너무 나이를 먹고 너무 힘들게만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다들 양심선을 지켜서 한줄 서기를 하고 있다.

부부가 수십년을 살면서도 서로 양심없다고 비난할 때가 종종있다.

아마 서로의 친가에 대한 상대 배우자의 배려없음이 발단이 되는 경우일 것이다.

자기 부모에게 대하는 것엔 이미 정해진 룰이 있었을 것이고!
시부모나 처가에 대한 배려는 당연 인식의 차이 생각의 차이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기에!

신은 이러한 모습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좀 오래 참으시지만! 역시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 구약 4천년을 지켜보다가 니네 양심이 좀 문제가 있노라!

내 사랑하는 자를 보내서 일깨워주리라!
그리하시고 험난한 가정에 태어나게 하시고 험난한 일을 겪게 하셔서 그가 세상 사람들의 양심 밑바닥까지를 섭렵하게 하셨다

그리고 사명을 선포하시고 내 말을 들어라!
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하시는 말씀이니라!

나를 본자는 내 아버지를 대하는 것과 같으니라!

너희 생각차원에선 몇 만년이 지난다 할지라도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터이니!
부디 내 말을 들어보고 내 아버지의 심정을 깨닫기를 구하노라!

나는 생각차이 때문에 멀어진 너희와 내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주러 왔노라!

부부를 예시해보자!

남편은 하루 일과를 열심히 노력하고 가정에 도움이 되고자 야간엔 대리기사를 하면서 또 노력하였다
아내는 자녀에 교육에 힘쓰고 가사에 힘쓰며 역시 부지런히 살고있다
헌데 돈이 부족했다. 왜그럴까? 참다 못해서 좀더 노력해서 더 벌어오면 되지 않느냐고 한 마디를 했다.

신랑은 자신이 ATM기기 같아서 정떨어져서 사랑의 마음의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래서 여사친에게 자꾸만 마음이 갔다.

이러한 사실을 우연히 알게된 아내는 신랑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에 상처받은 신랑은 아예 정까지 떨어져서 이혼 결심을 하게되었다.

이처럼!

인간과 하나님의 마음은 서로에게 사랑이 식어져만 왔던 것이다 이것이 구약 4천년 한많은 섭리역사 였던 것이다

이를 깨달은 예수께서 내가 아들로서 사명을 깨달았노라!

종의 굴레어서 벗겨서 이들을 아들로 타시 태어나게 해야지! 거듭나게 해야지!
굳게 굳게 결심하시고 사명선포를 하셨다.

이 말씀들을 전하자! 어느 신앙에 열심인 한 사람이 선생이시여 사람이 어찌 거듭 날수 있나이까?

그러자 예수께선 네가 오해하였도다.

생각이 바뀌어야한다 차원이 바뀌어야한다
우선은 내말을 더 쭈욱 들어보고 나를 따라다니며 배워라!
그러면 자연히 깨우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선 이처럼! 그시대 말이 통하지 않는 삭막한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떡이야기를 하면 떡으로만 이해하는 지극이 육적인 세대에 태어나신 것이다.

원시인에게 사랑이란 남녀의 결합이외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누가 현시대에 출산만을 목적으로 결혼을 하는가?

그처럼! 생각차원에서 그 시대 사람의 양심선도 결정이 되는 것이다.

구약 생각차원은 종이었다
신약 생각차원은 아들이었다.

이미 지난 과거형이다.

이 시대엔 이미 신약역사 2천년 섭리가 지난 것이다.

새시대 새섭리엔 다른 생각차원의 역사가 도래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새시대 새로운 역사가 펼쳐져야 하는 까닭이다.

부부란 가정이란!
더욱 깊은 것을 깨우칠 수 있는 삶의 수련장이다.

서로를 양심없다고 비난할 때엔 내 생각차원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리스도가 가셨던 길 그 생각의 길이 무엇이였을지를 고뇌해보아야 한다.

인류구원역사의 한 파트를 내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따라가고 있음이다.

이 한마디가 고뇌하고 있는 가정에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