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감정의 골짜기

골짜기란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길이고 계곡물이 흘러가는 패인 지형이다.

인류는 각자의 거대한 산을 형성하고 그 문화를 형성하고 이념을 형성하고 그를 토대로 민족과 국가를 형성해왔다.

거대한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골짜기엔 감정의 선들이 흘러간다.

보여지는 실체의 세계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하나의 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인 육과 영체인 영을 가로지르는 혼적세계가 존재한다.

혼이란 어떠한 세계일까?
혼이란 육체와 영체사이에 느낌의 세계를  품고 흐르고 있는 감정의 골짜기와 같다.

육도 산이고 영도 산이다.
그 산과 산 사이로 감정의 골짜기가 있으며 그곳엔 혼이 태동하여 흘러간다.

예시하여 보자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산이 생성되어 있다면 그 사이엔 감정의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어떠한 것이 인류의 공동선이냐? 악이냐?를 논외로 치더라도...

그 거대한 이념의  산 사이로 인류의 감정선이 흘러가는 것이다.

인류는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강력한 두 이념에 직면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극명하게 대립하고 쪼개어져서 각자의 산을 쌓아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모냥새다

아무래도 효율성인 측면에서 인간의 게으름과 동기부여라는 인간 본성을 간과한 공산주의가 밀리는 형국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 두 이념의 산 사이로 인류의 감정선이 흘러가고 있다.

마치! 양달에서 응달을 바라보다가 다시 응달에서 양달을 바라보는 인류의 감정선이 물결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나아갈 공동선은 어떠한 모양과 형상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해오고 있다.

우리는 인간사를 이렇게 재단하여 바라보듯이!

신과 인간이라는 두 거대한 영역을 두고서도 감정의 선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어떤때는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을 바라보았고!
어떤때는 인간의 영역에서 신의 영역을 인식해 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신이 인간을 바라볼때에도 감정선이 있고!
인간 또한 신을 바라볼때 감정선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가 바벨탑을 쌓아가는 노력을 보고서 어쩜 저리 행하는 것이 악하기만 할까?
한탄하고 후회하셨다.

싹 쓸어버려야 겠다.

너무도 화가 많이 나신 것이다.
아마도 기대치가 너무 컸기에 그러신듯하다.

도공이 몇주씩을 공을 들여서 가마에 구운 도자기를 꺼내어 과감하게 깨버리는 이유는 바로 걸작품을 만들어 내려했던 뜻이기에!

일반 생활자기를 만들려 했으면 굳이 깨버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모두가 개성을 지닌 걸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심파날엔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짐승에겐 심판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들에겐 살아남는 생명력 그것이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선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엔 하나님의 심판대상이 아닌 짐승 암수 한쌍씩은 태우게 하셨다.
다 태울수는 없었기에!

헌데 실패한 작품인 인류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감정의 선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들의 시각으로 평가한다.

헌데 제대로 된 걸작품인 인류가 있었으니! 후아담인 예수님이고 생명나무라는 걸작품으로 나타나셨다.


그래서 그의 감정선으로 하나님에 대한 탐구와 통찰이 기록된 것이 신약의 성경이다.

그리하여 인류가 신에게 나아갈 생명의 길을 내게 된 것이다.

이로써 그길로만 가면 누구라도 하나님과 만날 수 있으며, 종처럼 살았던 차원에서 아들차원의 삶으로 신과 동행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의 성경을 읽으면서 생명나무인 대걸작품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감정의 선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통찰하여서 기도할때 예수님께 깊이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설교로 풀어내고 말씀으로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오실이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그것은 정신나간 소리다 육체가?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오는 것인데 그의 심정과 사명으로 오는 것이다.

엘리야가 세례요한의 몸을 쓰고서 나타났듯이!

예수님의 심정과 사명으로 나타나는 이가 재림주의 사명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재림주는 어떻게 성장하고 사명자가 되어가는 것일까?

바로 성경을 통해서 생명나무인 예수께서 어떠한 감정의 선으로 하나님을 대하셨는지를 깊이있게 도를 터득하듯이 깨우치고 오는 것이다.

하버드 신학교에선 절대 가르칠수 없고 배울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다시오는 사명자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철저하게 배우고 깨닫고 영으로 혼으로 육으로 사랑함으로서 그 사명을 받아서 오는 것이다.

깊은 계시를 받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계시란 심정의 깨우침이고, 감정의 선과 결을 터득하는 것이다.

예수께선 영으로 나타나 사도 바울을 깨우치셨듯이!

2천년이 지난 시점에 그러한 사명자 한명을 키워내지 아니하셨을까?

이것을 놓고서 기도하고 시대를 깨닫고 알아가기 위해 남은 인생의 시간을 투자해봄이 어떠한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생각으로 주는 오시지 않을 것이다.
오시는 방법도 배우고 깨달아야 예비하고 맞을수 있지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