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관조의 창

집안 창문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반대로 지나가다 어느 집 창문을 통하여 그 내부를 들여다 본다.

집 안에 있는 사람도 집 밖에 지나가는 행인도 서로가 다른 위치에서 서로의 위치를 바라보고 짐작한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감정선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판단한다.

도인들은 이 관조의 세계를 무척 동경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수시로 자신을 관조하고 또 세상을 관조하여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어찌보면 좀 냉정한 사상과 생각으로 판단하여 인간사를 벗어나서 생활하는 것으로 비추인다

사람인데 어찌 감정을 배제한체 살아갈 수 있을 터인가?

우린 성경에 기록된 구절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을 기억할 것이다.


마태복음 15장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리스도가 어찌 사람을 개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이런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신앙성을 버린 배교자들의 족속들을 그리 비유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것은 관조의 세계를 오가는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이다.

도인들은 깨달음을 얻고 나면 인간사 사람들의 삶이 마치 땅속을 뚫고서 살아가는 두더지와 같이 혐오스럽게 느껴진다고 한다.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속으로만 행하고 다니는 두더지의 인생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도 빛가운데로 다니라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그러한 과정속 인식세계로 느껴지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차원에 접근한다면 혹세무민하는 정치인도 권력자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태양계 넘어 다른 행성을 1년 안에 오간다 할지라도!

신앙에서 차지하고 있는 관조의 영역은 그 역할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것도 관조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이어야 하는지를 바라보는 가치의 영역 / 관조된 세계를 인식할 때 가능한 것이다.

야만과 문명이란 가치의 기준도 관조된 영역에 발을 디딘 자들만이 논할 수 있는 세계다.

사람의 인식이 고도화 되어서 상식의 범주가 그 크기를 확대해 갈때에 우린 서로가 서로를 관조된 세계의 잣대로 대하고 바라볼 것이다.

1번 이니 2번 이니! 이러한 단순 반복적이고 시대착오적 발상들도 이 차원으로 올라갈 때에 사라져 갈 것이다.

사고의 틀과 생각의 유연성 그리고 가치관의 변화를 겪고서 비로소 구름이 걷힌 산 아래의 모습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리라!

개인의 삶도 가정의 생활도 그리고 민족과 국가간 문화의 충돌도 이러한 해법 아래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가진자와 빼앗기는 자 / 군림하려는 자와 군림당하는 자의 삶들도 어느 하나의 접점에서 만나야만 세상의 평화가 이루어질 터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애타게 외치시던 예수의 그 가르치심이 세상 도인들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인생이 가야할 길이 인간으로서 완성되어가는 과정들이 인종과 민족과 국가를 아울러서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이 삶의 질을 운운하는데 그 삶의 질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양적 풍요로움을 벗어나서 질적 풍요로움에 도전하는 삶일까?

도인들은 도복 한벌이면 만족한다.
카톨식 신부님들도 사제복 한벌이면 족하다.

그러한 의지의 표현으로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관조의 창을 통하여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생각은 수시로 무시로 할수 있으나 생각의 시작점과 그 시선이 머무르는 지점에 대한 관조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고선 얻어지는 것이 없다.

오늘 하루도 무언가를 얻고 배우고 깨닫기 위한 삶속 관조의 창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 시선이 어디를 향하여 뻗어가고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