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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를 이룬다는 의미

사람이 태어나 일가를 이루었다면 개성으로서 그 길을 개척한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이 태어난 목적이 무엇일까?

그저 한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함 때문일까?
아니면 기발한 생각으로 과학의 한 분야를 진보시키기 위함일까?

실리적 이유도 있겠지만!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왜 산에 오르냐고?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오르는 것이다.

길은 가면,  가다보면 생기는 것이 길이다

사람의 생각이란 것도 바르던 바르지 않던 가다보면 그 것이 길이된다.

동성애는 어떠한가?

신체적 호르몬이나 뇌이상으로 인한 자극을 쫒는 정신이상의 행태일까?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냥 그러한 생각들을 이루려는 시도요 행태인 것이다. 그것이 길이다.

앞으로 1천년이 지나면 동성애는 사라질까? 아니면 희귀질환으로 남게될까?
그도 아니면 존속될까?

동성애로 맺어진 부모 밑에서 자란 아들이 성전환 수술을 받을때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떠할까?

부모 마음이 다 다를까?

일가를 이루기 위해선 이지가지 다양한 조직 구성원들의 생각들에 대하여 인지하고 조율하는 과정들이 필수다.

홀로만 독보할수 없는 것이다.

내가 가는 길엔 가족과 형제, 지인, 직장 동료들이 동행하게 된다.

일국의 통치자라면 어떠할까?

그 자리가 선거로 선출된 자리일 수도 왕권을 계승한 위치일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위치와 사명에서 일가를 꾸려 나간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좀더 쉽게!

한 남자가 사랑이란 핵심적 이유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 교육. 혼인에 이르기까지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 생각으로 시작된 일이 여러 구성원의 참여 및 귀속으로 인하여 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이끌어가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러한 상황적 인식을 통하여 처음 마음가짐이 작금에 어떠한 심리상태로 변하였는지를 살피는 것이 일가를 이루어가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어떤 생각만으로 의지만으로 열정만으로 일가를 이루어 가기란 어려운 것이다.

50%의 지지율을 얻은 대통령도 임기 후반엔 30% 지지율도 얻기 힘든 것이 실정이다.

그리스도란 자리는 그 사명과 위치는 인류 전체를 위해서 신권으로 부여받은 자리인 것이다.

헌데 하늘에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다.
땅에서 이끌어가는 역사인 것이다.

본래 생각의 길이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서 탄력적으로 그 길을 헤쳐가야 하는 것이 이치이고 상식이다.

여기는 절대예정/상대예정에 대한 신학적 뜨거운 논쟁이 있을 터이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으로 보면 예수께선 베드로라는 무지한 어부를 택하신 것이다.

신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거지 나사로가 더 신령했다.

베드로는 일생을 먹고 사는 것에만 매달렸던 촌부일 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놓으니!
배가 잠기도록 물고기가 잡히니 두려웠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냐고 물었다.

처음부터 쓰였어야 했던 바울은 오히려 적대시하고 예수를 적그리스도라 대적했다

그러하니!
결국 베드로라는 촌부를 뽑아서 그 밑바닥에서부터 복음을 펼수 밖에 없었다.

일가를 이룬다는 현실적 고뇌는 작게는 가정에서 크게는 국가와 천주적 차원까지 그 깊이와 차원에 있어서는 다를지라도!

그 본질적 문제는 안고서 가는 것이다.

가정도 그렇다.

결혼을 해서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여 대학을 보낸다.
군대를 다녀와서 혼인을 시킨다.
여기까지가 대부분 가정을 꾸린 사람들의 인생 1막인 것이다.

그러고나면 인생 2막을 펼치려는 사람들은 졸혼을 하여서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서 각자의 가치관을 충족시키며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사생애와 공생애와 부활생애의 삶을 거쳐간다.

개인이 성장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있고,
성장하여서 공적으로 보내는 사명의 기간,
그리고 그 공생애를 토대로 쌓아놓은 결과위에서 스스로를 평가하고 보완하여 인생을 마무리 짓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자녀의 혼인까지 끝냈다면 그 이후의 시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새기면서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지점에 안착해서 초막이라도 하나 짓고서 자기 수양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절대자를 만나러 가기위한 보완의 시간이자 성찰의 시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