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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근성 신광야 그리고 가나안

사람은 누구나 안주하고 싶어하는 관성력에 이끌리어 간다.

가만히 있는 돌은 그대로 움직이려 하지않고 굴러가는 돌은 계속 구르려 한다.

사람의 뇌도 물질이라서 관성력에 좌우된다.

뇌의 파장이 마음이 된다.

사람 마음도 관성에 좌우되는 것이다.

신광야란 자기한계의 시공간이다.

그 안에서 가나안을 향한 의지를 새기는 곳이다.

나이 40을 불혹이란 부르는 이면엔 그 세월을 통해서 이미 자기 생각이 들어서 있기에 어떤 생각에 쉽사리 휘둘리지 않게 되는데 이는 관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주관과 고집이 생기는 것이고, 좋은 말로는 신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한 나이를 지나면서 모세는 새로운 생각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으로 승화시켰다.
신광야에서 여인을 만나고 자녀를 얻고!
자기 한계의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며 얻었던 것이다
그 생각의 세계를!

그 새로운 생각으로 가나안이란 하나의 이미지를 실체화 시켰던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른다고 표현하였다.
아마도 신안이 뜨여서 환상이나 이상으로 계시를 받았던 터이다.

그 가나안 이란 새로운 생각을 설파하였다.
그 말씀을 듣고 따른 이들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겨우 한 발씩 옮겼다.

그들의 무딘 행동만큼이나 그들의 생각의 변화도 무디었던 것이니!

모세가 한눈만 팔았다하면 이상한 짓거리를 일삼았다.

그러한 족속들을 이끌고 가나안 이란 새로운 세계로 개척해가야 하였던 모세다.

우리는 대부분 노예근성에 젖어서 살아간다
안주라는! 적응이라는! 현실직시라는!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면서 자아실현의 가나안을 가보지도 못한채 신광야에서 그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을 꼭 들어가라 유언했던 구시대 사람 모세의 행동을 따라한다.

자녀들에게 너는 그 가나안을 가보아라! 하는 것이다.

어느 무리의 수장으로서 이끌어가는 노정이란 참으로 지난 삶이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실체를 느끼고 확신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가?

나를 보고 날 보내신 이를 믿어라!
내가 행한 일을 보고 나를 믿어라!

그리스도라는 사명을 무엇으로 표현해야만 그들이 믿고 따를수 있었을까?

어떻게 설명해야만 구시대 종의 인식에서 새시대 아들이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게 할수 있었을까?

그 고뇌를 일가의 수장으로서 그리스도도 모세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일가를 이룬다는 것! 일가를 꾸려간다는 것!

나는 앞서가고 그러진 못해도 그러한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왔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헌데 모세를 악평하던 예수를 향해 돌을 던지던 그 사람이 나일수도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의 시작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시대 신광야는 무엇이고?
이시대 가나안은 무엇인가?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생각과 같이 온다.
그 생각을 받아들이냐의 여부에 따라서 생각의 세계는 몇천년을 오가는 것이다.

그에따라 영의 세계도 그 차원을 오가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