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불확실성의 사랑과 자유의지

불확실한 세계란 무엇일까?

나는 확신한다. 나는 믿는다.

이것이 인간이 지니는 삶의 행태이다.
생각이고, 관념이고, 지식이고, 결국 신앙이 된다.
그러한 카테고리안서 하나님도 인식하고, 존재하신다.

하지만 신이라면 전능자라면 삶의 모습은 어떠하실까?

루시엘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모습만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하니라!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이리행하라! 말씀하시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대로 운행되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하나님은 이상하고 기묘한 세계를 추구해 가셨다.
심지어 잘 소통할 수 없는 유형의 세계와 그 존재물들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상한 유기물들을 생명이라 칭하시고, 최종적으로 인간이란 궁극적 존재를 창조하시기에 이르렀다.

천사로선 기대가 컸을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대하시고, 그들을 통해 무언가 비조영들에게 혜택이 돌아갈수 있는 천지개벽의 섭리를 펴신다 하셨으니!

헌데 행하는 것을 보니 좌충우돌에 머하나 제대로 행하는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만족하셨다.
원시인류인 인간에게 하나님은 뜻을 펴신 것이다.

이것만 빼고 네 자유의지로 행해보아라! 하시며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루시엘은 옆에서 자켜보았다. 만물들에게 이름을 짓는 것과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을!

인간은 논리적으로 유일신인 하나님을 찾게된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있음을 눈지채고 그 존재자를 하나로 인식한다.

그러한 인식이 초기인류의 인식수준이었다.
처음부터 삼위일체의 전능자를 인식하지 못하고, 전능하신 유일한 존재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시행착오를 바라보시며 기뻐하셨다. 그러한 인류의 모습이 하나님께는 삶의 할력소가 되고, 고독한 내면에 기쁨이 되셨다.

인간의 삶은 생각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과 실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고차원과 다차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를 행하면 상대는 그 영향을 같이 받게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행위가 또 바뀌게 된다.

아담이 홀로 있을때엔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이 상대체인 하와를 창조하니 그로인하여 아담의 행실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않다 여기시고 하와를 창조하신 것이다.

사탄이 하와를 꼬이고, 하와는 다시 아담을 유혹했다.
꼬이는 영들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루시엘은 인간창조 이전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헌데 상대적 세계인 피조세계에 피조영인 인간을 창조하니 탈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은 차원적 세계를 추구하신다. 비조영의 세계로는 만족하질 못한 것이다.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는 편리한 세계는 하나님껜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삶을 하나님은 일상으로 보시고 사랑의 세계를 창조하셔서 사랑의 만족을 느끼고 싶었던 뜻이다.

불확실하고 자유의지대로 행하니 무엇을 어떻게 인식할지?
심지어 하나님 자신을 어떻게 깨달아갈지 불확실성 속에서 존재하시게 된 뜻이다.
그로인하여 아픔도 있지만, 간절해지기도 하셨다.

전능자에게 누가 그리도 사랑의 아픔을 줄수 있을까?
신의 사랑이란 1차원적인 사랑이 아님을!

신의사랑인 천지만물들과 그 안에서 존재하는 피조영과 비조영들의 상호적 영향까지를 아우르고 계시다.

물과 기름이 있다. 섞이지를 않는다. 하지만 강하게 뒤흔들면 일시적으로 섞이게 되고, 방치하면 또다시 분리되어 존재한다.

어느순간 이어지고, 어느순간 멀어져서 존재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찰라적, 순간적 사랑으로 영원으로 기억하신다.

오랜 시공간을 존재해오신 하나님과 길어야 100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인간과의 삶!
그것도 하루의 대부분을 먹고, 마시고, 잠을자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 짧은 찰라의 시간만을 하나님을 찾아서 사랑하는데 그 순간을 영원으로 부르시고 기억하신다.

인간의 영원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은 그 개념이 다르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아루와 같다.
구약의 1천년을 4번이나 반복하여 4일간의 사랑!
신약의 1천년을 2번 반복하여 2일간의 사랑!
그리고 1천년 마지막 하루를 가장 뜨겁게 만나서 신부와의 사랑을 펴가고 계신다.

하나님께는 이러한 아주 짧은 시간이 영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랑의 강도를 영원성의 척도로 삼으시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랑의 불확실성이나, 자유의지의 모습은 하나님께는 설레임과 삶의 열정으로 인식되는 뜻이다.

무엇이 영원한 것인가?
무엇이 사랑인가?
예측가능하고, 정형화된 틀속엔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다.
같은 뜻으로 외식과 형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사랑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신다.

하물며 지구상 80억의 사랑이 획일화되고 잉여화 된다면 공장에서 같은 물건을 찍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사랑은 개성이고 그 이면엔 반드시 자유의지가 있어야한다.
자유의지란 신부의 기름과 같고 그것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