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신부의 덕목

< 자두의 대화가필요해 ㅡ 사랑의 정의 >

사랑이란
1. 관심이고 interest
2. 표현이고 expression
3. 반응이다 reaction

흥미를 느끼는 부분에서 표현이 나오고 그 표현에 대한 반응이 있어야한다

자두씨의 노래가사엔 이것이 다 설명되어 있다

마치 사랑에 서투른 유저들에게 사랑을 공략하는 만랩 매뉴얼을 보여주는 듯 하다.

사랑의 세계가 고도화 될수록 요구되는 덕목들도 더 깊어진다.

주인이 종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때엔 의식주를 신경써주면 된다.

그것이 종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다.

성경엔 구약시대 하나님과의 사랑에 대한 지적을 예수께서 하시고 신약의 아들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신다.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신학자 설교가 부흥강사 여러 사명자들이 있었음에도...
왜 이부분을 논적으로 잘 설명해주지 못하였을까?

시대성이다 새시대가 와야 한차원이 올라가야 구름 아래 세상의 실상이 보이는 법이니

마태복음 6장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신약역사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은 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 의란 하나님을 목숨다해 사랑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와같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두번째다.

하여! 신약의 두 계명은 하나님 사랑/ 형제사랑이다
이것이 의를 구하는 것이고 신약의 하나님과의 사랑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약역사의 덕목에서 새시대 사랑 애인된 신부된 사랑의 깊은 덕목은 무엇일까?

차원높은 사랑을 하기위한 품성이나 덕목이 있지 아니할까?

바로 관심/표현/반응 이것을 한 단어로 묘사하자면
집요함이다.

사랑은 개성의 깊은 세계다.

자신만이 깨닫고 그 길을 간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고집하고 홀로 고독하게 추구하며 그 과정에 하나님과 1:1의 사랑을 추구해간다.

그 부분에 필요한 자질이 집요함이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하여 관심과 표현 그리고 반응을 하기 위해선 집요함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만족하시도록 집요한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사랑이란 어떠한 면이 다를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그 사랑하나에 가문도 원수도 잊어버린채 사랑 하나만을 위하여 집요하게 도전하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얻겠다는 그 집요함이다.

광기라고도 집착이라도 할수 있겠으나!

선의지를 추구한다면 그것을 집요함이라 부를 것이다.

그렇다면 새시대 역사의 사랑세계를 신부로서 완성해 갈수 있는  신부로서 자질이란 바로 집요함이라 할 것이다.

집요한 사람만이 자신이 걷고 있는 그 길의 끝까지를 갈수 있는 것이다.

가다가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더 계속 걸어갈 테니까!

그러한 마음과 생각이 그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될 터이니!

이러한 차원에서 바라보는 주일신앙이란 참으로 형과 식일 뿐이다.

하나님의 새시대 역사에서 바라시는 신부의 사랑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거룩한 주일이 일요일 뿐일까?
주일은 주와 더불어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다.

헌데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그 깊은 사랑의 세계에선 주일이 따로 있을까 싶다..

하나님으로선 너무도 짧은 인생 하루와 같은 육계의 100년 시간

그안에서 하나님과의 신부급 사랑의 깊은 차원에 도달해야 할진대!

신부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아야하고, 신부의 단장이 요구하는 덕목에 대한 진의를 터득해야 그 길을 걸을수 있다.

사도 바울은 아들에대한 개념을 깊이 깨달으려 마지막 순간까지 몸부림을 치다가 갔다.

하지만!

아들의 모습을 예수님 살아생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에 깊은 대화 한번 나누어보지 못했기에 제자들에게 전해듣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적과 표적을 행했다는 그 단순한 사실전달의 허무함과 곤고함 속에서 평생을 살다가 갔다.

마음으로만 그리다 손가락 한번 스쳐보지 못한 애절함을 채우지 못한채 그렇게 마지막까지 살다 간 것이다.

신부란 실체속에서 터득되고 깨달아지는 덕목이다
실체를 접해보았기에 더 간절하고 집요하게 그 느낌을 추구해가는 것이다

예수께선 그 집요함의 덕목을 심어주고 가신 것이다

그 손끝한번 스쳐보고 싶어서 육신쓴 예수님을 신약역사가 2천년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 육신쓴 예수님은 다시 오지 못할 터이다.
단지 시대는 새롭게 오고 말씀도 새롭게 오고, 그 안에서 시대역사는 신부급 차원의 역사를 가는 것이다.

집요한 사람만이 묵묵히 신부로서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지 말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