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전능자 여호와를 보일수 있는 신으로 쪼개어 볼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나님. 성령님. 성자 이 세 분의 전능자 신은 삼위를 이루는 각위로서 일체를 이루고 있다 함이다.
빛이란 보여지는 세계다.
빛을 이루는 세가지 파장. 그것이 적색, 녹색, 청색 이다.
RGB 색이다.
삼위일체란 인간인식의 근본이다.
무형의 세계를 유형의 세계로 표현할수 있는 최소단위다.
전능자는 아버지의 모습과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분의 신이 셋의 모양과 형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의 형태로 나타날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근본자 여호와를 성삼위라는 기독교의 교리로 형상화시켰다.
구약엔 성령의 존재가 나오지 않으며, 성자의 존재 또한 나오지 않는다.
신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독생자로 칭하니!
유대인들에게 유일신 여호와를 신성모독한다 하며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하였다.
구약성경엔 곳곳에 볼수 없는 여호와를 보여지는 형상으로 표현하려다 우상숭배로 심판을 받았으며, 감히! 여호와의 얼굴을 본자는 죽었다.
그런 인식이 예수님때까지 있었기에!
삼위일체란 인식은 유대인들에겐 신성모독이고, 참람함 그 자체였다.
인식의 전환이란 그러한 것이다.
기존의 신뢰를 뿌리째 뒤흔들었으며!
기존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무너트렸다.
천동설이란 인식도 지동설의 출현엔 흔들릴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뒤흔들어놓는 과학적 탐구나 진리는 배척받았으며, 한바탕 피바람이 지나고 나서야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여! 방법론적 회의라는 진리의 탐구방법은 위험했으며,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선각자들은 진리를 위해선 목숨을 도외시 한채 각자의 길을 걸었다.
볼수 없는 세계는 볼수 있는 존재물의 형상과 모양으로 비유할수 있으며, 그러한 인식의 접근은 인간에게 보다 확실한 깨달음과 믿음을 가져다 주었다.
예수님도 비유를 들며 자주 말씀하셨다.
천국은 겨자씨앗과 같고 누룩과 같으니! 등등
이처럼 보여지는 실상을 통해서 보이지않는 영혼의 세계를 깨우치셨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성자라 칭하셨을까? 왜?
아들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셨을까?
본인을 전능자인 성자로 착각하신 것이였을까?
아마도 처음엔 그리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성자와 자신의 사명관계를 깨달았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라는 목수의 아들에서 성자라는 깨달음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으셨던 것이다.
전능자 하나님의 심정과 뜻을 깨달아가는 생각의 세계에선 신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 상황에 이르렀을 쯤엔 인간과 신의 경계를 더욱 정미하게 깨닫게 되시는 것이다.
또한 육신의 생각을 벗어난 인간의 생각이란 신의 생각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안에 아버지가 아버지안에 내가 실존함을 깨닫는 것이다.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것이나 다르지않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무엇인가를 하신다해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마지막 순간에 하신 기도 내용은 저들이 알지못하고 행하니 용서해주시옵소서! 라며 간구하신다.
이는 인간이기에 그렇게 중보기도를 하는것이다.
마지막까지 전능자 성자라고 생각하셨다면!
저들을 심판하노라! 하셨을 것이다.
신인 전능자는 심판의 권세를 발휘하셨을 것이다.
아무리 귀여운 애완동물이라도 주인을 물때는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목수의 아들에서 성자로 그리고 마지막 순간엔 성자에서 시대 사명자의 한 인간으로!
이러한 심적인 심경변화는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에겐 넘어서기 어려운 성경해석의 난제로 남게되는 것이다.
영계의 비밀이다. 일체의 시스템인 것이다.
무형과 유형의 세계를 연결시키는 메카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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