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통해 변화의 이치를 깨달아 가는 것을 신령이라 말한다.
나무를 보자!
나무란 씨앗이 자라서 성장해간다. 그리고 잎이 푸르고 키도 더욱 자란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단풍이 들고 겨울엔 잎이 떨어져서 호흡을 멈춘것 처럼 보인다.
이러한 순환을 무한 반복해가면서 수명을 다해가는 것이다.
하여 사람들은 봄 /여름 / 가을 /겨울 이라는 4계절을 깨닫게 되었다.
봄이 돌아와도 새잎이 돋아나지 아니하면 죽었다고 판단한다.
신령이란 변화의 이치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는 것도 변화의 이치를 진리로 풀어내는 것이다.
예배드린다는 것도 신령함의 이치를 풀어내고 전하며 깨닫는 것이 핵심이다.
하여 신령한 말씀은 변화의 이치에 대하여 풀어주게 되어있으며, 그리스도는 신령함의 상징이 되었다.
하여 신령한 자는 깨달음 없인 될수 없으며, 신의 영이 임해야 가능한 것이다.
다시 나무로 돌아가보자!
사람들은 그들의 뜻대로 의지대로 될수 있는 자연현상이 어느 하나 없는 것을 깨닫고서 그러함을 원리와 이치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받아들였다는 것은 실제로 존재함을 의미하며, 이에서 실존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된다.
자연현상과 원치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성 등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세계를 접하면서 그리고 경험하면서 신령함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원시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배워가는 것은 극히 미미했을 것이다.
영계를 접했다면 해와 달의 원리와 이치를 하나님께서 가르치셨을 것이며, 천지창조의 원리도 가르치셨을 것이다.
하지만! 현 인류의 초등학생보다 못한 혼적 인식능력은 제한요소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이치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원시인류에게 죽음이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인가?
죽으면 사라진다 흙으로 돌아간다. 그 이치를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하니! 하나님은 죽는다고 엄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개념도 원시인류에겐 말 그대로 영원히 살수 있다는 희망일 뿐이다.
그런 무지한 개념들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살들이 하나되어 살아난다는 맹신을 지니게 하였다.
결국 신령함이란 육은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영의 존재세계와 이치를 더하여 알아가는 것이다.
구약이란 참으로 무지몽매한 세계였다. 몽학선생일 뿐이다.
꿈으로만 알아가는 실제와는 동떨어진 신앙이였던 것이다.
신령함은 삶속에서 묻어 나온다. 살아있는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죽은자와 죽은자의 행실에선 찾을수 없는 생명된 세계다.
삶이 죽어있는 자들에겐 신령함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같은 자들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죽어있다 죽었다고 정의하는 것이다.
정녕코 죽으리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카테고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