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보는 눈이 있어야 무슨 일이던지 제대로 접근할수 있다 라는 말을 합니다.
본다 라는 것은 인식한다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인식이란 사물이나 사안의 본질을 보다 정치하게 파악하고 대처하기 위한 준비과정입니다.
사람의 미적 기준인 심미안도 그 차원이 다르고 접근방식도 다릅니다.
무엇을 아름답다 논할 것인가?
감각이란 실체를 파악해가는 도구입니다.
아무리 정밀한 분석기기도 탐지한계 (detection limit)를 지닙니다.
ppm(10의 -6) / ppb (10의 -9 ) 이 한계를 벗어나면 정확도를 담보할수 없습니다.
사람 인식의 한계도 그와같아서 머가 더 있는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로 파악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밭이라는 비유를 드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 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심미안이란 사람의 마음으로 파악하고 인식하며, 궁극에 다다르고자 하는 인식행위를 뜻합니다.
그리하여! 인식도구인 마음이란 그릇이기 되기도 하며, 문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마음인데 문이 되기도 하며, 그릇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같은 뜻입니다. 차원이라는 문이 될수도 있으며,
차원이라는 그릇이 되기도 합니다.
문이나 그릇이나! 결국 차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차원이란 세계를 예수님께선 마음이란 동양의 언어를 통해서 묘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심장(heart)을 통해서 이해가 되었을까요?
하지만! 내면에 스스로가 가져야할 덕목이란 정도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결국 심미안이란 것도 차원성에 기반을 둔 개념입니다.
차원이란 무엇일까요?
불가능한 것을 도전하는 것이 차원입니다.
가능해보이는 것을 행하는 것이 차원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육에서 영을 바라보는 것!
영에서 육을 바라보는 것!
인간이 신을 이해하려는 것!
신이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것!
인간이 신이 되려는 것!
신이 인간이 되려는 것!
이것이 차원입니다.
불가능한데 가능케 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차원입니다.
예수님은 차원의 문을 열었습니다.
인간이신데 신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나 십자가 고난후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영광스런 신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장 큰 업적은 화목제의 사명이였습니다.
화목제란 신과 인간사이에 화목을 위해 쓰였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으로 신이 됨으로써 신과 인간사이에 소통의 길과 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산맥사이를 뚫고서 고속도로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하와 이후에 끊어졌던 하늘과의 소통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하니! 진리란 차원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차원성이 결여된 진리는 더이상 진리가 아니고 지식에 지나지 않게 됟니다.
구약 4천년의 율법은 이시대엔 더이상 진리가 아닌 지식이고, 역사적 사실일 뿐입니다.
심미안이란 차원의 결을 볼수 있는 눈이라고 파악할수 있는 것입니다.
차원이란 육과 영을 동시에 파악하고 분석하는 노력을 뜻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차원의 길과 문을 열어놓으며, 그 길과 문을 통해서 사람들은 감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예술의 극치는 도덕의 극치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차원을 통해서는 세상 모든 것들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원의 문이 닫혀있는 생각과 글들은 사람들에게 더이상 감동을 주지못합니다.
사람의 감동이란 차원의 문을 열고 들어갈때 나오는 순수한 감탄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경이로움입니다.
감동이 죽었다는 것은 본인에게도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힘겨운 노동일 뿐입니다.
더이상 유희의 범주에 들수 없게 됩니다.
헤르만헷세의 노벨문학상 [ 유리알유희 ]라는 작품을 보면 인간본성의 궁극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를 보여준다.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ㅡ 두산백과.
유리알 유희'라는 것은 헤세가 창작한 것으로서, 그러한 유희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카스터리엔이라는 미래의 이상향에서 2400년경에 쓰여졌다는 설정을 해놓고, 이보다 약 200년 전에 존재하였던 카스터리엔의 유희의 명인(名人) 크네히트를 회상하며 서술하는 형식을 취한 정신문화사적인 미래소설이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라고 불리고, 가공할 만한 정신의 황폐를 초래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정신의 권위를 되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나, 교양있는 사람들에 의해 종교적인 이상향이 건설되고, 이곳 학교에서는 '유리알 유희'라는 고래(古來)의 온갖 학예의 정화(精華)를 종합한 영재교육이 실시된다.
이 유희는 '문화의 전체 내용과 가치를 가지고 하는 유희'이며, 인류가 학문과 예술의 각 분야에서 획득한 일체의 가치를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듯이 다루는 종합예술을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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