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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목적은 실존이다


1. 창조란 틀을 벗어나는 것이고,
2. 실존이란 스스로 존재케 하는 행위다.

창조의 틀

창조란 기존의 틀(인식)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하늘 천사의 1/3인 루시엘 족속들이 반기를 들고 격렬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행위를 해오고 있다.

인식의 범주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한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났기에 그들은 존재목적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인간이란 인식의 대상을 끼워넣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과 천사는 직통의 관계성인 것이다.
헌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호하고, 살피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깨우쳐 나가라고 하였다면..

루시엘은 수호천사장이다. 그만큼 나름 예민하고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잘 느끼는 족속들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기대하시고 사명을 주고 행하기를 기대하신 뜻이다.

기대란 깨어짐의 반대말이다. 깨질수도 있지만!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기대섭리다.

천사도 인간도 회개라는 구원의 수단이 있기는 매한가지다.
헌데 생각본위의 천사와 마음본위의 인간은 장단점이 극명하다.

생각본위란 무조건 직진이다. 그래서 확고하지만! 융통성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마음본위에서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다양한 선택지를 지니고 취사.선택의 자유의지를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인간에게 의의 길로 이끌어주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며, 인간은 천사에게 인간 개개인인의 자유의지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개성적으로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과 천사의 공존을 도모하신 것이라!


실존행위

실존은 스스로 존재케하는 행위라고 정의 하였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왜 그러하실까? 바로 자유의지의 본체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누구로부터 생각의 세계를 강요받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한 절대적 생각세계를 인간에게도 허락하신 뜻이니!
그러한 생각의 세계를 공유할수 있는 존재야말로 하나님의 상대체로서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창조본질은 구약에선 드러나지 못하였다.
생명나무의 길을 벗어난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더이상 찾아볼수 없었다.
타락된 마음으로 짐승의 그것으로 나아갈뿐 영혼으로 변화는 더딜수 밖에 없었기에!
하나님은 자유의지보다는 율법이란 생각본위의 절대명제를 주신 것이다.

해라!/ 하지마라! 그것이 십계명의 본질이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의 신약시대에 이르러 주기도문이란 가이드라인과 마음.뜻.목숨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처럼 네 형제를 사랑하라! 는 원론적 주제를 제시하신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라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면서 율법이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각자가 하나님께 묻고 응답받으란 뜻이다.

비로소 생각이라는 세계의 문을 열어놓으신 뜻이고, 그것은 자유의지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명나무의 길이 열린 것이다.

12사도들과 사도바울의 근본적 차이점이 바로 이에 있다고 볼수 있다.
생각의 세계, 자유의지의 세계는 지식이 있어야, 즉 자료가 있어야 생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전혀 새로운 것을 가져다놓고 표현하라고 하면, 무슨말을 할수 있을까?

하지만! 기존에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그 지식을 기반으로 분석하고 연구해서 나름의 생각을 표현할수 있는 것이다.

12사도들 중에 학식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겠으나, 사도 바울처럼 율법과 세상학문에 통달한 제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의 틀, 인식의 틀을 베드로가 벗어나기까지 쉽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외적증거자인 것이고, 바울은 내적 증거자인 것이다.

외적증거는 보여지는 것을 증거하는 세계이고,
내적 증거는 보이지 않는 것을 증거하는 세계다.

왜 바울이 신령하다고 평가받는 것일까?
그가 지닌 학식에 기반하기 때문이고, 그 학식을 토대로 사유하고 분석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영이란 무엇인가?
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육의 세계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영과 혼의 세계를 육의 세계에 펼쳐서 그려내는 행위예술이다.

사람들은 그 행위예술을 통해서 영과 혼의 세계를 탐닉하고 매료되고 빠져드는 것이다.

춤이란 춤사위란! 사람의 행위예술이다.
몸짓, 손짓 하나 하나가 예술이다
아름답고, 웅장하고, 신비하다.

하지만 단지 실체의 느낌으로만 다가선다면 그 예술가의 영혼의 세계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앙이란 예술세계를 통하여 영혼을 깨우고 그 영혼의 세계에서 개개인과 만나서 사랑세계를 창조해가고 싶으신 것이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두고서 실존세계를 열어놓으신 것이다.
자유의지를 인간에 부여하였으며, 그 자유의지라는 개성의 도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세계를 키워가도록 허락하신 뜻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실존의 첫 문턱은 생각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기도하면 들리는 응답은 네 마음안에 거하니라! 이런 음성일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마음이란 실존의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돈에 있고, 명예와 권력에 있다면 절대패자만이 하나님을 소유하고 독점할 것이다.
마치 중세시대 교황들처럼!

가이사의 것인 가이사에게!
사람이 가이사형상의 돈을 가이사에게 세금으로 받칠 것인지?
아니면 마음의 정성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할것인지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음의 근본인 실존의 세계를 설파하신 것이다.
사람이 어떠한 행위를 하지만!
그본은 그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바리새인들은 마음이란 올무에 걸려있던 것이다.
마음으로는 느끼고 있지만!
외식과 형식의 세계로는 담아낼수 없기에 딜레마에 빠졌있던 것이다.

신앙이란 이처럼 실존세계의 본질성이다.

[ 하나님이 있다 /없다 ] 서로가 다투고 쟁론한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각자의 외식과 형식 그리고 살아온 세월만큼의 주관이 더하여져서 진실된 마음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