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는 것이 있기에 서로가 소통하기 위해 노력을 행한다.
기대하는 말이나 몸짓 미소 등등.
기대도 없고, 관심도 없으면 소통도 사라진다.
대화의 상대로서 다가서는 것은 기대심리가 있어서다.
나의 생각과 사상을 상대에게 드러내고, 상대의 생각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행위다. 이를 소통한다 칭한다.
인간사에선 그러함이 일반이거니와!
신과 인간의 세계에선 기도라는 소통의 방식이 존재한다
하나님! 부르면 응답한다. 마음에서 들리기도 하거니와, 궁금한 것을 물으면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부를 수 있고, 그 마음 안에서 응답이 들리기도 한다.
실존세계의 과정이다.
결국 기대심리가 발동하면 소통이 시작되고, 그러한 소통들은 실존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자신이 소통의 주체가 되기위해서는 소통의 상대체를 인정할 수 있어야 대화가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인정하는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이다.
창세기 4장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은 소통의 주체로서 나는 이러한 인식을 지니고 있다고 선포하신다.
창세기 28장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너는 나를 어떻게 인식하며 내게 나아오는 것이냐? 나는 내 모습은 이러하니라!
네 조부 아브라함에게 행했던 그 모습이며, 네 아비 이삭에게 나타났던 그 모습의 하나님이니라!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내게 나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대목이 중요한 구절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에게로 나아가는 문이라 말씀하셨다.
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신의 모양과 형상을 본 자가 있으며? 또 볼수 있는 자가 있는가?
그러하니! 결국 신의 모양과 형상이란 사람의 뇌에 그려지는 인식에 불과한 것이다.
메시아란 그리스도, 즉 기름부은 자로서 하나님이 시대에 인정한 인식의 실체다.
그리스도와 같은 모양과 형상이면 나로 여겨도 부족하지 않으며, 온전한 자다.
성경의 말씀처럼! 내 사랑하는 자다. 그런 의미다.
마태복음 3장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세례요한도 유대제사장들도 이러한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평하기를! 목수의 아들인 네가!!
참람하도다!
무지속 상극세계를 일으켰으며, 세례요한도 엉뚱한 이야기나 하고 세례요한의 사명인 그리스도에 대한 전초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에 여우 헤롯에게 모사를 당하여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으니!
신약의 시대에선 그리스도의 말씀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리스도를 닮아서 하나님께 행실로서 나아가는 것이다.
하여서! 그리스도를 근본, 반석이라 칭하는 것이다.
시대 사명자의 향기가 아니면 하나님께 나아갈수 없다는 뜻이다.
그 사람의 사상과 생각은 하나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모세시대엔 모세의 사상과 생각, 예수님 시대엔 그 분의 사상과 생각이 하늘과 소통을 위한 키가 되는 것이다.
카테고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