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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단어에 담긴 진의

기독교의 사랑이란 언어표현은 광범위하다.

신적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엔 차원이 있어서 서로가 접근해 가기엔 인식의 간극이 너무 크다.

헌데 이러한 사랑에 대한 인식의 간극을 메꾸고 나타난 이가 있으니! 그를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 불렀다.

주인과 종으로 빗대던 오직 순종과 충성만을 맹세하던 구약시대를 종결시킨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에 무슨 사랑이 존재했을까? 오직 율법아래에 매여서 따르면 살고, 벗어나면 사망으로 사라지는 것을!

구약의 역사가 4천년을 갔을 지라도!
신약의 예수께서 펼친 하루의 사랑역사가 더 유구한 것을!

구약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그러한 문제의식도 없었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랑의 그리스도를 맞이하지 못했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하지만 나사렛의 한 청년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신에게 사랑으로 다가섰다.

창조주이니까! 당연히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것도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생각이 싹트게 되었다.

누가복음 2장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선 바로 이러한 어린 소년을 찾아내었고, 그를 그러한 그의 믿음을 의라고 여기시고 기름부으사 그를 의롭게 하셨다.

신약의 믿음의 시작이 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새로운 섭리역사가 신약 2천년의 기간을 지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휴거에 대한 광증으로 하늘 구름을 보고 공중휴거를 기대했었다.

구약 유대인들이 바라던 전능하고 무쌍한 왕과 같은 메시아상과 무엇이 달랐을까?

새로운 역사란 새로운 섭리란 바로 제대로된 역사의 문제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성경의 아가서를 보면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듯이 그러한 섭리역사를 하나님이 인류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계신다.

사랑이란 인식의 간극을 좁혀오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러한 사랑의 인식에 존재하고 있는 간극을 좁히고 다가선다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랑역사의 섭리가 더 차원높게 새로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한 사랑이란 인간의 몸으로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정성과 사랑 그리고 모심과 섬김의 지극함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진실되고, 가식이 없는 그러한 사랑이니!

예수의 말씀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그 구절이 귓가를 맴돈다.

우리는 알아가고 느껴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섭리 그러한 사랑의 세계는 이미 펼쳐가고 있음을!

성령의 귀가 있는 자는 깨달을 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