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사람의 인식 그 익숙함. 사람의 인식의 핵은 익숙함이다. 자주 접해보았거나, 이해가 되는 생각의 관념들이다. 그러한 인식관이란 학문도 예술도 신앙도 매한가지다. 이단아란 별칭이 왜 나오는 것일까? 그 익숙함의 범주를 넘어서 경계 저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존재행위를 우리는 우리의 인식관으로 재단하고 평가한다. 개인이던 단체이던 어느 하나의 익숙함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경험과 이해의 사고폭이 요구되는 것이라!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물어보았다. 주는 그리시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그러자! 예수께선 이를 깨닫게 해주신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베드로의 인식의 폭이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을 담기엔 부족했던 것이다. 따르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담기엔 부족한 인식이였을 진.. 더보기 기도의 조건 기도하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들으신다. 1. 기도자가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하고 있는지를 신혼골수를 쪼개어 보시기 때문이다. 2. 의로운지 불의한지를 살피신다. 그 생각과 마음이고 그 이전의 행위들이다. 3. 삶속 행위의 토탈로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니! 하나님께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 함이라! 4. 시대메시아의 기도가 들어지는 것은 그가 그 시대에서 가장 의롭기 때문이고, 의로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의롭기에 한분 뿐이신 선한이와 통하는 것이다. 더보기 말과 말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이는 생활의 언어와 가르침을 구분짓는 표현이다. 밥먹어야지! 이것이 말씀인가? 말인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말도 되고, 말씀도 된다. 도에서는 도즉무언이라 말한다. 도는 깨달음이란 형태도 없고 형식도 없으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르는 길이라 말하여 도라고 하는 것이다. 도란 길이다. 예수께서도 길가에 씨앗이 떨어졌다고 표현하지 않으셨는가? 길이란 마음이다. 하여 사람의 마음이란 길과 같다. 길에선 하는 일이 많지가 않다. 쉬어가는 것이고, 거기서 임시 거쳐정도는 움막으로 지을수도 있겠으나! 집을 짓고 살림을 살지는 않는다. 인생이란 여정이고, 과정이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정형화 되어있는 가치있는 말의 구조라고 볼수 있다. 그것은 서양이란 라이프스타일이 유물론적 사고관이기 때.. 더보기 사랑이란 느낌이다 다음에 두가지 어구를 예시해보면.. 1. 한 번을 만나도 느낌이 중요해! ( 대중가 가사 ) 2. 요한계시록 3장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느낌이 없는 사랑이 있을까? 느낌이 없는 신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너는 이 계명을 지켜라 이는 너와 나의 율례니라! 너는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며 나아가라! 구약과 신약의 사랑기준이 이러하다. 헌데 구약은 정언명령이다. 해라. 하지마라! 신약은 좀 개선이 되어서 강요하진 않는다. 그래도 이랬으면 좋겠다며 넌지시 아우트라인을 정해놓았다. 신앙의 핵은 사랑이다. 사랑을 지키고 표현해가는 과.. 더보기 개성의 축복 신의 사랑이란 과연 인간적 사랑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인간의 사랑이란 이 사랑이 아니면 다른 사랑을 찾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랑이 없고, 그 사랑이 다시금 회복되도록 살아생전 끝없이 기회를 주며 돌아오기를 기대하신다. 그것이 인간에겐 축복이 되는 것이다. 사회에서 몇번의 실수를 한다면 그 사람은 영영 그 자리에서 사명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개성의 사랑이란 생각을 품고 있기에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수많은 생각들로 우리는 일생을 살아간다. 아들이 많은 집엔 딸하나 얻는 것이 바램인 경우도 있어서 딸많은 집들을 그리도 부러워한다. 80억 인생들이 살아가는 지구촌에서 각 사람의 개성된 생각들을 태에서부터 살피시는 하나님 이신지라! 그 사랑이 그토록 소중하고 애타.. 더보기 감사의 세계와 신령 인간은 왜 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신이란 창조주이며, 인간에게 생명의 그 시작이 되시는 것이다. 자녀는 부모로서 태어나게 해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느끼고, 때가 되어 육신의 부모가 그 생을 다하고 떠날때즘엔 더욱 감사의 깊이를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라! 우린 죽으면 영혼의 창조주에게 다가가고 믿던 믿지 아니하던 한번쯤은 맞닥뜨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러하듯! 만사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와 결별하면 영영한 이별이 찾아오듯이! 우리의 육신의 뇌가 다하는 순간 창조주와 영원한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 헤어짐의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 영혼은 살아생전에 그 사람의 뇌를 통하여 수없이 감동을 더하여주고, 깨닫게 해주기를 쉬지.. 더보기 형제 주관권 형제란 같은 핏줄이기에 누구보다 정이 깊고 우애가 넘쳐아만 정상이다. 헌데 같은 집안에서 자라면서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주장하고 분노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를 두고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부모입장에서 형인 가인에게 한 말씀 하셨을까? 창세기 4장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신약은 하나님앞에 같은 자녀권의 역사로서 형제끼리 하늘 역사를 펴온 것이다. 같은 형제이면서도 너무도 잔인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약의 .. 더보기 자녀권 역사의 한계 자녀를 낳고 키워본 사람이라면 양육하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경험했을 터이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만 나아가는 자녀를 보고 있노라면 전생에 무슨 업이 있어서 이리 부모와 자녀로 만났을까?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솟아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자녀권 역사인 신약의 역사도 하나님의 입장에선 참으로 곤역스러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물론 전혀 말귀가 안통하는 구약의 종들시대보단 나아졌다고 할만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근본 심정세계를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정말 깊은 사랑의 차원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고, 그리하면 자녀권 역사의 한계를 실감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 하였을지라도! 왜? 다시 오셔야만 하는지를 깊이 깨닫지는 못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신다는 말에만 몰두 하.. 더보기 이전 1 ··· 28 29 30 31 32 33 34 ··· 48 다음